겁설관(怯薛官)은 몽골제국에서 황제 근시 조직으로, 겁설은 원래 은혜 · 은총이라는 뜻을 지닌 게시그(kesig)의 한어 표기이이다. 겁설관은 칭기즈칸이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의 자제(子弟)를 자신의 시위로 삼은 것에서 비롯하였던 바, 쿠빌라이가 즉위한 후에 조직화되었다. 이들은 주로 시위(侍衛)와 황제의 거마(車馬), 여장(廬帳), 관복(官服), 음식, 의약(醫藥)과 같은 일상시봉(日常侍奉) 등의 맡은 일에 따라 세분되었다.
무기를 지니고 호위를 하는 이로는 활과 화살을 소지하던 코르치[火兒赤], 환도를 소지하던 와르두치[云都赤] 등이 있었다. 문서 사무에는 필도치[必闍赤]와 자르구치[札里赤] 등이, 가축이나 금수(禽獸)의 사육 등에는 매를 사육하던 시바우치[昔寶赤], 양을 사육하던 코이치[火你赤], 그 외 겁린구[怯憐口] 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게시그는 황제와 사적인 주종(主從) 관계를 맺었는데, 이것은 공적인 군신(君臣) 관계보다도 강조되는 조직이었다. 특히 몽골제국에서는 국정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인 ‘어전주문(御前奏聞)’에 관직을 지니지 않은 겁설관이 고위의 재상들과 함께 참석하였고, 겁설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국정에 반영될 정도여서 황제는 측근인 겁설을 통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겁설 중 처음 등장한 것은 홀치[忽赤]였다. 1274년(원종 15)에 충렬왕이 즉위한 직후에 독로화(禿魯花)로 가 있던 의관자제(衣官子弟)들을 모아 조직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들 홀치는 ‘중조(中朝)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처럼, 몽골의 겁설이 4번으로 나뉘어 3일 교대로 숙위를 한 것처럼 3번 3일 교대로 숙위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시바우치라고도 하는 응방(鷹坊)이 확인된다. 응방은 매를 고급하고 사육하는 기관이자 사람을 뜻하는데, 이 외에 『고려사』 병지의 “홀치와 응방의 3품 이하로 하여금 활과 화살을 갖고 번갈아 입직(入直)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에서, 국왕의 숙위 역할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겁설 조직 외에도 숙위를 담당한 친위군으로 우달치[迂達赤], 조라치[詔羅赤], 팔가치[八加赤] 등을 비롯해 국왕의 주위에서 여러 가지 잡무를 처리하는 아차치[阿車赤], 속고치[速古赤], 파오치[波吾赤] 등도 확인된다. 이들은 궁문을 지키거나 의복, 음식 등의 일상생활을 보조하는 등 궁궐의 관리, 국왕의 생활 시봉의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무엇보다 충렬왕은 세자이던 시절에 몽골에 가 있는 동안 스스로가 황제의 겁설에 속해 숙위한 경험을 하였다. 몽골에서 부마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가질 수 있게 된 겁설이라는 조직을 고려에 돌아와 즉위한 이후 왕권 강화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홀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겁설관은 기존 친위군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주요한 숙위 기구로 활동하였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충렬왕이 즉위한 직후에 의관자제(衣冠子弟)를 대상으로 하여 홀치를 조직하였다. 1년 뒤인 1275년(충렬왕 1)에는 응방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어, 이 역시도 충렬왕 즉위 초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278년(충렬왕 4)에는 필도치[必闍赤]를 두어 기무(機務)를 맡기고 있다. 이렇게 충렬왕 대 초반에 일련의 새로운 근시 조직이 설치되었다.
이는 충렬왕이 몽골제국의 부마라는 지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몽골의 권위를 내세워 국왕 주도의 정국 운용을 꾀한 것으로 생각된다. 겁설이라는 총체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기능상 필요한 겁설의 조직별로 하나하나씩 설치해 나갔다. 이후 1371년(공민왕 20)에 ‘겁설’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공민왕 때에 충용위를 새로이 설치하는 등 국왕 시위 조직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2군6위라는 고려의 군제 내에서 겁설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였으나, 겁설관에 대한 개혁 등은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으로 넘어와 군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모두 없어졌다.
겁설관은 황제 외에도 제왕(諸王), 공주, 부마(駙馬), 후비 등도 설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에서 코르치, 필도치를 비롯해 겁설의 사례가 보이며 ‘왕부단사관’의 사례도 발견되면서, 이들의 존재가 고려를 몽골제국의 투하령(投下領)으로 파악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고려 국왕은 몽골제국 내에서 부마고려국왕이라는 자격으로 ‘왕부(王府)’를 열고 여러 겁설 조직을 마련하고 있어, 고려는 몽골제국 내에 속한 하나의 정치단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몽골 왕부의 조직과 비교하면 필도치와 단사관만 등장하는 등 왕부 관련 제도가 불완전하며, 겁설의 설치 과정도 충렬왕이 겁설 조직의 일부를 선택하여 설치하고 황제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과도한 해석이다.
충렬왕은 즉위 이후 왕권을 구축, 강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몽골의 겁설 제도를 수용하였다. 이는 몽골의 권위를 내세워 국왕이 주도하는 정국 운용 방식으로 마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재추들은 ‘조종(祖宗)의 제도’가 아니라고 하는 불만을 갖기도 하였으나, 몽골 제도에서 기원하고 충렬왕이 몽골의 부마라는 점을 통해 무마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