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도치 ()

고려시대사
제도
1278년(충렬왕 4), 몽골의 영향으로 등장한 문서 담당 관직.
이칭
이칭
필자적(必者赤), 비자치(閟者赤), 비도치(閟闍赤), 비칙치, 비체치
제도/관직
설치 시기
1278년(충렬왕 4)
폐지 시기
고려 말기
소속
정방(政房)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필도치는 1278년(충렬왕 4), 몽골의 영향으로 등장한 문서 담당 관직이다. 충렬왕은 즉위 이후 왕권을 구축, 강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몽골의 겁설(怯薛) 제도를 수용하였으며, 필도치(비칙치)는 그중 하나였다.

정의
1278년(충렬왕 4), 몽골의 영향으로 등장한 문서 담당 관직.
임무와 직능

몽골의 겁설제의 일부로, 문서를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려사』 등 대부분의 사례는 필도치〔必闍赤, 비체치〕으로 나오나 필자치〔必者赤〕의 사례도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비자치〔閟者赤〕, 비도치〔閟闍赤〕의 사례도 있다.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는 서기(書記)를 의미하는 비치제치(bichijechi) 또는 비체치의 음사(bichechi)로 보았으며, 이슬람권의 몽골사인 『집사』에는 비틱치(bitikchi)로 나온다. 따라서 비칙치 또는 비체치의 두 가지로 흔히 표기하고 있다.

최씨 정권 이후 국왕을 비롯하여 고위 재상들이 정방(政房)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정방을 확대하여 왕권을 장악하고 국정 장악을 도모하는 것은 신료들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이에 충렬왕은 몽골에서 정책 결정 방식을 차용하였다. 곧 몽골에서는 상조(常朝)가 없이 어전주문(御前奏聞)의 형식으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비칙치가 이 과정에 참석하여 배주(陪奏)하면서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는 측근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충렬왕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궁중에서 기무(機務)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되었기 때문에 ‘별청재추(別廳宰樞)’라고 불릴 정도로 국왕의 측근들이 임명되었다. 필도치는 정방필도치(政房必闍赤)의 용례도 보일만큼 정방과 결합하여 운영되었다. 이 때문에 정방원 중 일부가 필도치였다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방과 필도치는 설치 시기가 크게 다른 별개의 조직인데 구성원이 겹치고 있어서 이러한 오해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변천 사항

1278년(충렬왕 4)에 재추가 너무 많아 정사를 도모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궁궐 안에 모여 기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는 김방경 무고 사건 이후 국정을 주도하기 위한 충렬왕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필자적’이란 표현은 1225년(고종 12)에 정방을 처음 설치하면서 선발된 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기록되어, 정방과 관련하여 혼란을 준다. 초기 연구에서는 이 기록을 그대로 수긍하였다.

그러나 정방의 설치를 말해주는 이 기사의 원전으로 이해되는 이제현의 『 역옹패설』에서 ‘필자적’의 구절이 없다는 점, 1225년이라는 시점에서 고려가 몽골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 ‘필자적’은 1278년에 가서야 설치된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필자적’을 정방과 관련지어 오해한 『고려사』 찬자의 오류로 이해된다.

의의 및 평가

필도치는 몽골에서 코르치와 함께 겁설의 중요한 분자 중 하나였으며, 황제 외에도 제왕(諸王), 공주, 부마(駙馬), 후비 등도 설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에서 코르치와 함께 비칙치가 설치되고 ‘왕부단사관’의 사례도 찾아지면서, 이들의 존재가 고려를 몽골제국의 투하령(投下領)으로 파악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고려 국왕은 몽골제국 내에서 부마고려국왕이라는 자격으로 ‘왕부(王府)’를 열고 여러 겁설 조직을 마련하고 있어, 고려는 몽골제국 내에 속한 하나의 정치 단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몽골 왕부의 조직과 비교하면 비칙치와 단사관만 등장하는 등 왕부 관련 제도가 불완전하며, 겁설의 설치 과정도 충렬왕이 겁설 조직의 일부를 선택하여 설치하고 황제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과도한 해석이다.

충렬왕은 즉위 이후 왕권을 구축, 강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몽골의 겁설제도를 수용하였으며, 필도치는 그중 하나였다. 이는 몽골의 권위를 내세워 국왕이 주도하는 정국 운용 방식으로 마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재추들은 조종(祖宗)의 제도가 아니라고 하는 불만을 갖기도 하였으나, 몽골 제도에서 기원하고 충렬왕이 몽골의 부마라는 점을 통해 무마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이명미, 『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혜안, 2016)
김창현, 『고려 후기 정방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98)

논문

임형수, 「고려 후기 겁설제 운영 연구」(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김보광, 「고려 충렬왕의 케시크제 도입과 그 의도」(『사학연구』 107, 한국사학회, 2012)
이개석, 「『고려사』 원종·충렬왕·충선왕 세가 중 원조관계기사의 주석연구」(『동양사학연구』 88, 동양사학회, 2004)
박용운, 「고려 후기의 필도치(필자적, 비칙치)에 대하여」(『(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 일조각, 1994)
森平雅彦, 「駙馬高麗國王の成立-元朝における高麗王の地位についての豫備的考察-」(『東洋學報』 79-4, 1998)
森平雅彦,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 1998)
白鳥庫吉, 「高麗史に見たる蒙古語の解析」(『東洋學報』 18-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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