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忽赤(홀적)’으로 표기한다. 홀지(忽只) 또는 화리치(火里赤)로도 불렸다. 국왕의 호위를 맡은 군사는 대전홀치(大殿忽赤), 세자의 호위를 담당한 자는 세자부홀치(世子府忽赤)라 하였다.
전통(箭筒)이라는 뜻을 지닌 몽고어 ‘gor(xor)’의 한어(漢語) 표기 ‘忽’과 ‘○○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몽고어 ‘ei’의 한어 표기 ‘赤’이 합쳐진 말이다. 몽고 숙위제도의 영향을 받은 관제이다.
1274년(원종 15) 충렬왕이 원나라에 뚤루게(禿魯花 : 볼모)로 갔던 의관자제(衣冠子弟 : 벼슬아치의 자제)를 모아 숙위를 맡게 하고 홀치라 칭한 것이 최초의 출현이다. 처음에는 4번(番)으로 편성되었다가, 이듬해에 3번으로 개편되었다.
1309년(충선왕 1)에는 다시 4번으로 복구되었으나, 1378년(우왕 4)에 이르러 근시좌위(近侍左衛) 및 우위·전위·후위라는 명칭으로 개편되었다. 주로 믿을 만한 의관자제가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는데, 충렬왕 때에는 달달인(達達人)을 이곳에 분속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은 홀치청(忽赤廳)이라 불리는 곳에 거처하면서 주로 왕실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왕명을 받아 죄인을 체포하고, 시가(市街)의 순검을 돌기도 했으며, 과장(科場)의 경비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원나라의 동정군(東征軍)에 보충되기도 했으며, 왜구 및 합단(哈丹)의 침입 등 외침의 격퇴에도 동원되었다. 한편, 이들은 왕으로부터 토지를 받아 방목소(放牧所)를 운영하기도 했고, 재추(宰樞) 못지 않게 왕을 위한 향연을 자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숙위와 그에 따른 은총을 빙자해 역마(驛馬)를 마음대로 타고 다니고, 향리와 결탁해 수령에 대항하는 등 불법행동을 자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사로이 부리고, 타인의 토지를 강제로 점탈하는 등 민폐를 야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