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장삼가(張三哥). 회회인(回回人)으로, 아버지 장경(張卿)은 원나라 세조 때에 벼슬을 하여 필도치(必闍赤: 書記의 일을 맡은 관인)가 되었다.
원나라의 제국공주(齊國公主)가 고려에 들어올 때 겁령구(怯怜口: 사속인)로 공주를 따라 들어와 귀화하였다.
이 때 낭장에 임명되고 그 이후 여러 번 진급을 거듭하여 장군에 이르러 장순룡으로 성명(姓名)을 고쳤다. 원나라와의 대외관계에서 사신으로 활동하여 6회에 걸쳐 출입하면서 외교에 공이 있었으며, 왕도 장순룡을 신임하여 장순룡의 집에 어가(御駕)를 자주 옮겼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의 칙명으로 선무장군 진변관군총관 정동행중서성도진무(宣武將軍鎭邊管軍摠管征東行中書省都鎭撫)에 임명되었다. 1287년에 왕이 장순룡을 원나라에 보내어 이인춘(李仁椿)의 딸을 바치고 공주의 진주의(眞珠衣)를 구하니, 원나라의 왕이 쌍주금패(雙珠金牌)를 하사하였다.
부지밀직(副知密直)을 거쳐 1297년에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죽었다. 당시의 권신인 조인규(趙仁規)와 사이가 좋지 않아 면회를 할 때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같은 겁령구인 차신(車信)·인후(印侯)와 더불어 권세를 다투고 사치함을 서로 경쟁하여 집을 일으킴에 화려함을 다하였다.
또한, 기거랑(起居郎) 오양우(吳良遇)의 집과 이웃하고 있었는데 이를 빼앗고자 하다가 되지 않으니, 무뢰배를 동원하여 집을 부수는 등 행패가 극심하였다.
장순룡의 사치함은 담을 쌓는 데 화초(花草)모양의 무늬를 하니, 이 때의 사람들이 ‘장가(張家)의 담’이라 하였다 한다. 1298년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 행차하여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장순룡의 집에 퇴거하여 덕자궁(德慈宮)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