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의 비(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온 회회인(回回人) 순룡(舜龍)의 아들이다.
인후(印侯)의 아들 인승광(印承光)과 같이 과거를 보았는데, 똑같이 학문과 재주가 없었으나 시관이 아첨하여 급제시켰다.
1301년(충렬왕 27) 왕이 수강궁(壽康宮)으로부터 장선의 집으로 옮겨 머물렀는데, 장선의 아버지 때부터 저택을 화려하게 꾸미고 왕을 모셔 덕자궁(德慈宮)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일찍이 합포만호(合浦萬戶)로 나갔을 때 동래현 해운대(海雲臺) 소나무에 시(詩)를 지어 적어놓았는데, 최해(崔瀣)가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기롱한 사건이 있었다.
1310년(충선왕 2)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가까이하여 특별히 총애하던 내관(內官)들에게 향읍(鄕邑)을 봉하여주고 그 나머지에게도 관직을 주었는데, 이 때 검교평리 광주목사(檢校評理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312년 검교평리 행평양윤(檢校評理行平壤尹)으로 옮겼으며 1320년(충숙왕 7)에도 검교평리로 있었다. 덕수(德水: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로 본관을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