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의 딸로 1244년(고종 31) 태자비가 되고, 1260년(원종 1) 왕후로 책봉되었는데 외가의 성을 따라 유씨(柳氏)라고 하였다. 시양후(始陽侯) 왕태(王珆)와 순안공(順安公) 왕종(王悰)을 낳았다.
1277년(충렬왕 3) 병이 많고 허약한 아들 순안공을 위하여 맹승(盲僧) 종동(終同)을 시켜 건강을 빌었는데, 내시 양선대(梁善大)와 수장(守莊) 등이 왕을 저주하고 순안공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이 되게 하려 한다고 무고하니, 왕이 이습(李槢) · 이지저(李之氐) 등에게 명하여 종동을 국문하게 하였다.
또한, 중찬 김방경(金方慶), 밀직사 허공(許珙), 감찰시승(監察侍丞) 조인규(趙仁規) 등에게 명하여 모자를 심문하였으나, 불복하므로 왕이 직접 순안공을 불러 심문하였다.
끝내 불복하였으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조인규를 원나라에 보내어 순안공이 저주한 일을 고하였으므로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순안공과 종동은 섬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