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初名)은 백료손(百遼遜). 위구르(Uighur, 回鶻) 사람으로 고조부 위래티무르[嶽璘帖穆爾] 이래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아버지 설철독(偰哲篤)은 강서행성우승(江西行省右丞)을 지냈다. 조상 대대로 설련하(偰輦河)에 살았으므로 설로써 성을 삼았다.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원순제(元順帝) 때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거쳐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로 뽑혀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그러나 승상(丞相) 합마(哈麻)의 시기를 받아 단주(單州)로 나가 지키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서 살게 되었다. 1358년(공민왕 7) 홍건적(紅巾賊)이 대령을 핍박하자 난을 피하여 고려로 오게 되었는데, 왕이 즉위하기 전 단본당에서 황태자(皇太子)를 가르칠 때 원나라에 가 있던 공민왕(恭愍王)과 친교가 있었으므로 후한 대우를 받았다.
1360년 고창백(高昌伯)에 봉해지고 뒤에 부원후(富原侯)에 승봉(承奉)되었으며 부원의 전토(田土)를 하사받았다. 고려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저서로는 『근사재일고 近思齋逸藁』가 있다. 아들은 설장수(偰長壽)·설연수(偰延壽)·설복수(偰福壽)·설경수(偰慶壽)·설미수(偰眉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