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재일고 ()

한문학
문헌
고려 후기의 귀화 문인, 설손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372년에 판각한 시문집.
정의
고려 후기의 귀화 문인, 설손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372년에 판각한 시문집.
개설

설손이 고려에 귀화(歸化)한 후 중국에 있을 때 지은 시문들을 기억나는 대로 다시 편집한 개인문집이다.

편찬/발간 경위

원래 설손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지은 초고(草藁) 7책 13권이 있었으나 중국에서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잃어버리고, 고려로 귀화한 후 기억에 남은 시문 700여 수(首)를 기록하여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2질(秩)로 엮었다. 그러나 1질은 아들 설장수(偰長壽, 1341∼1399)가 홍건적의 개경 침입 시에 피난을 가다가 다시 잃어버렸고, 다른 1질은 설장수의 친구인 진주통판(晉州通判) 김중빈(金仲彬)이 빌려가서 온전히 보관하고 있었는데, 설장수가 1372년(공민왕 21) 진주수령으로 나갔을 때 이것을 되찾아 판각(板刻)하였다. 한편 설손은 고려로 올 때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 1년 동안 지은 시문 300여 수를 엮어 『지동록(之東錄)』 1질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지적 사항

남극관(南克寬, 1689∼1714)의 『몽예집(夢囈集)』건(乾),「제근사재일고(題近思齋逸藁)」에 의하면 조선 중기까지는 전해진 듯하나, 현전하지 않는다.『근사재일고』에 관한 기록은『고려사(高麗史)』권112「설손열전」,『용재총화(慵齋叢話)』권8,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등에 보인다. 판각할 때 글씨는 넷째아들 설경수(偰慶壽)가 썼고, 이색(李穡, 1328∼1396)이「근사재일고후서(近思齋逸藁後序)」, 설장수가「근사재일고발(近思齋逸藁拔)」을 지었다.

의의와 평가

이색이 쓴 후서(後序)에 “젊은 시절의 작품에 노성(老成)한 기운이 있는 것으로 봐서 장년 시절의 작품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고 언급한 바, 귀화하기 전 중국에 있을 때 지은 그의 대표적인 시문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최초의 귀화인 시문집으로서 의의가 있다. 그는 위구르인(回鶻人)으로서 고려에 귀화한 문인이지만,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받아 『동문선(東文選)』 등 역대의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32수의 시가 거듭 뽑혀 있다.조신(曺伸)은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그의 시가 건실(健實)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동문선(東文選)』
『목은집(牧隱集)』
『몽예집(夢囈集)』
『소문쇄록(謏聞瑣錄)』
『용재총화(慵齋叢話)』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해동문헌총록 소재 고려문집 연구-부전문집을 중심으로-」(김건곤,『장서각』1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집필자
김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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