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손이 고려에 귀화(歸化)한 후 중국에 있을 때 지은 시문들을 기억나는 대로 다시 편집한 개인문집이다.
원래 설손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지은 초고(草藁) 7책 13권이 있었으나 중국에서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잃어버리고, 고려로 귀화한 후 기억에 남은 시문 700여 수(首)를 기록하여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2질(秩)로 엮었다. 그러나 1질은 아들 설장수(偰長壽, 1341∼1399)가 홍건적의 개경 침입 시에 피난을 가다가 다시 잃어버렸고, 다른 1질은 설장수의 친구인 진주통판(晉州通判) 김중빈(金仲彬)이 빌려가서 온전히 보관하고 있었는데, 설장수가 1372년(공민왕 21) 진주수령으로 나갔을 때 이것을 되찾아 판각(板刻)하였다. 한편 설손은 고려로 올 때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 1년 동안 지은 시문 300여 수를 엮어 『지동록(之東錄)』 1질을 남기기도 하였다.
남극관(南克寬, 1689∼1714)의 『몽예집(夢囈集)』건(乾),「제근사재일고(題近思齋逸藁)」에 의하면 조선 중기까지는 전해진 듯하나, 현전하지 않는다.『근사재일고』에 관한 기록은『고려사(高麗史)』권112「설손열전」,『용재총화(慵齋叢話)』권8,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등에 보인다. 판각할 때 글씨는 넷째아들 설경수(偰慶壽)가 썼고, 이색(李穡, 1328∼1396)이「근사재일고후서(近思齋逸藁後序)」, 설장수가「근사재일고발(近思齋逸藁拔)」을 지었다.
이색이 쓴 후서(後序)에 “젊은 시절의 작품에 노성(老成)한 기운이 있는 것으로 봐서 장년 시절의 작품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고 언급한 바, 귀화하기 전 중국에 있을 때 지은 그의 대표적인 시문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최초의 귀화인 시문집으로서 의의가 있다. 그는 위구르인(回鶻人)으로서 고려에 귀화한 문인이지만,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받아 『동문선(東文選)』 등 역대의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32수의 시가 거듭 뽑혀 있다.조신(曺伸)은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그의 시가 건실(健實)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