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은 양씨(梁氏)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인데, 속명은 알 수가 없다. 법명은 연감(淵鑑)이고, 식영암(息影庵)은 그의 호이다. 고승(高僧)들이 지니고 다니는 지팡이 석장(錫杖)을 의인화(擬人化)한 가전(假傳) 「정시자전(丁侍者傳)」의 작자이다.
식영암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 문인으로 생평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민사평(閔思平, 1292∼1359), 이암(李嵓, 1297∼1364) 등과 교유하였다. 이제현과는 동년배 혹은 연상으로서 유자(儒者)와 불자(佛者)간의 사귐이 막역(莫逆)하였다. 민사평에게는 대화상(大和尙)으로서 가르침을 베푸는 입장에 있었으며, 이암과는 만년에 방외우(方外友 : 신분을 떠난 친구)로서 교유하였다. 특히 이암은 식영암이 강화도(江華島)의 선원사(禪源寺)에 있을 때 절 가운데 집을 지어 해운당(海雲堂)이라 편액(扁額)하고 조각배로 왕래하며 각별한 교유를 하였다. 선원사에 있을 때에는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脩, 1320∼1392)에게 능엄경(楞嚴經)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원래 식영암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의 제자인 운기(雲其)라는 늙은 승려가 팔전산(八巓山 : 전남 고흥 팔영산) 만행사(萬行社)의 동쪽에 지은 암자이다. 이름을 식영(息影)이라 부친 것은 그림자가 산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취가 담장 밖을 넘지 않으며, 또 좌선(坐禪)한다고 앉았으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는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운기가 세운 이 식영암이라는 암자에 연감(淵鑑)이 거처하며 암자의 이름을 자신의 호(號)로 삼은 것이다.
식영암을 혹 식영감((息影鑑)으로 표기한 예가 있는데, 이는 승려의 경우 법명(法名)의 뒷글자만 지칭하여 선탄(禪坦)을 탄사(坦師)라 약칭한 것과 같이, 연감(淵鑑)의 감(鑑)자를 호인 식영(息影)에 붙여서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식영암의 정체(正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김현룡(金鉉龍) 교수는 부원배(附元輩)인 충숙왕(忠肅王)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 혜(譓)로서 출가(出家)했다가 환속(還俗)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김건곤(金乾坤) 교수는 고려사경(高麗寫經)에 근거하여 속성이 남원양씨(南原梁氏)이고 법명이 연감(淵鑑)인 고승임을 밝혔다.
식영암은 강화도의 선원사와 용장사(龍藏寺), 전남 고흥 월남사(月南寺)의 장로(長老)와 주지(住持)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화상(大和尙)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동문선(東文選)』에 13편의 산문작품이 뽑힐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식영암집(息影庵集)』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현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