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로 고려의 도읍을 옮긴 최우(崔瑀)가 대몽항쟁을 위한 국민총화의 일환으로 창건하였다. 초대주지로는 진명국사(眞明國師)가 위촉되었고, 2대 원오국사(圓悟國師), 3대 자오국사(慈悟國師), 4대 원명국사(圓明國師), 5대 굉연(宏演) 등 당대의 신망이 높은 고승들이 차례로 임명되었다.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당시 2대 사찰로 손꼽히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왕실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뒤 차츰 쇠퇴하여 조선 초기 이후에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현재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의 재조사업(再彫事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8년(태조 7)에 이 절에 있던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서울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까지 대장경판은 선원사에 보관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절이 대장경판을 만든 곳이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대장도감(大藏都監)의 본사(本司)가 강화도에 있었고 승려들이 경판을 필사하고 조각하였다는 점 등을 통하여 경판을 보관하였던 이 절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선원사지는 그 입지적 조건이 대장경판 간행사업을 진행시키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다. 두 궁성이 아주 가까운 곳이었고, 절의 앞뜰에서 부두가 보이는 곳이어서 목판 재목을 운송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이 절이 최우의 원찰(願刹)이었고, 충렬왕 때 궁전으로 사용하였을 만큼 규모가 컸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절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 치미(鴟尾) · 원숭이 상 등이다. 이들은 그 양도 풍부하고 질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거의가 고려 때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절에는 오백불상이 있었다고 하며, 사지는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