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제운(齊雲) 또는 진각(眞覺). 고려인으로서 중국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당나라 말에 저장성 항저우(杭州) 지방으로 가서 선법(禪法)을 구하다가 설봉(雪峰)을 찾아 선법의 대의를 묻고 수도하였으며, 설봉의 밑에서 오도(悟道)하여 법을 전해받았다.
그는 청원행사(淸原行思)의 7세손이 되었다. 언제나 누더기 한 벌을 걸치고 대중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누더기스님)이라고 불렀다.
설봉의 법맥을 이은 뒤 경청원(鏡淸院)에 머물다가 후저우태수(湖州太守) 전공(錢公)이 보자원(報慈院)을 창건하여 그를 모셨으며, 다시 전공은 용화사(龍華寺)를 창건하여 주지직을 맡겼다. 그는 이 절에서 선법을 전하다가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오월(吳越)의 왕은 그를 내도량(內道場)으로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청하였다.
탑은 대자산(大慈山)에 세워졌다. 그의 법문 중 일부는 화두(話頭)를 집성, 편집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고승들로서는 극히 찾아보기 힘든 예로서,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영조는 저녁 반달을 가리키면서 부상좌(溥上佐)에게 물었다. “저 한 조각 달이 어디로 가는가.” 부상좌가 “망상을 부리지 말라.”고 하자, 그는 “한 조각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때 한 승려가 “영단(靈丹) 하나로 철에 점을 찍으면 금을 이루듯이, 진리 한 마디로 범부에게 점찍어서 성인을 이룬다고 하니, 스님의 일점(一點)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대는 내가 금에 점찍어 철을 이루는 것을 알겠는가?” 하고 되물었다.
그 승려가 그러한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가르침을 청하자, 영조는 “일구(一句) 아래에서 깨닫지 못하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