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천도 ()

고려시대사
사건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
사건/전쟁
발발 시기
1232년(고종 19)
종결 시기
1270년(원종 11)
발발 장소
강화도(江華島)
관련 국가
몽골
관련 인물
최우(崔瑀)|고종(高宗)|유승단(俞升旦)|김세충(金世冲)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강화천도는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이다. 이는 최우(崔瑀)에 의해 단행되었고,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고려의 국도가 되었다. 이의 배경에는 정치적 측면에서 최 씨 정권의 정권 보위 차원, 지방 사회의 저항과 같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돌파하기 위한 면, 그리고 외교적 측면에서 몽골의 과도한 공물이나 인질 요구 등에 대한 회피 혹은 지연 전략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잠재되어 있었던 지방 사회의 저항을 새롭게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의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
배경

1225년(고종 12)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이를 계기로 몽골은 1231년(고종 18) 제1차 침입을 단행하였다. 이때 고려는 왕족 회안군(淮安君) 왕정(王侹)을 안북부(安北府: 평안남도 안주)에 자리 잡고 있던 몽골군 진영에 보내어 강화를 청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뒤 몽골은 점령한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인을 두어 고려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신을 보내어 과중한 공물과 함께 왕공(王公) · 대관(大官)의 어린 자식들까지도 요구하는 등 고려를 괴롭혔다. 이에 고려에서는 몽골군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강화도(江華島)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이었고, 국도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漕運) 등이 유리한 곳이었다. 마침내 강도(江都, ‘강화도성(江華都城)’의 줄인 말)의 시대가 열렸다.

최우(崔瑀, 최이(崔怡)로 개명)가 많은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천도를 강행하게 된 이유는 몽골군의 재침을 막을 확실한 방어책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몽골군의 전력이 매우 우세했던 점도 있었지만, 고려의 병력이 너무 미약했던 것에도 그 요인이 있었다. 또한 몽골군의 제1차 침입 후 초적(草賊)과 지방 저항 세력들의 활발한 움직임에 따른 불안도 크게 작용하였다.

발단

몽골의 침입은 최 씨 정권의 정권 유지뿐만 아니라 고려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따라서 최 씨 정권의 임전 태세는 이 시기 지방 사회의 동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 씨 정권은 몽골과의 1차 전쟁을 치른 이후 곧바로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왕이 피난하는 경우는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대외적인 침략을 당하면서 국도를 옮긴 경우는 강화천도가 유일하였다. 이는 고려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전술상으로도 단기전을 획책하는 몽골의 파상적인 공격에 유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들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1차 대몽 전쟁(1231~1232, 고종 18~19) 패배의 중심에 최우 정권이 있었다. 둘째, 몽골의 전쟁 승리에 따른 요구 중에서 국왕의 친조(親朝)가 있었는데, 국왕을 볼모로 했던 최우 정권으로서는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1차 대몽 전쟁에서는 초적과 같은 저항 세력이 중앙 정부와 협력하는 예도 있었지만, 사회 전반에는 무신 정권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모두가 최우 정권에게는 권력 유지의 커다란 걸림돌이었고, 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강화천도와 같은 응급 처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및 결과

최우가 개경을 떠나 다른 곳에 천도할 것을 작정한 것은 기록상으로 1231년(고종 18) 12월 경이다. 당시 최우는 승천부부사 윤인(尹繗)과 녹사 박문의(朴文檥) 등으로부터 강화도가 피난지로서 적합하다는 것을 보고 받고서 사람을 보내 천도 후보지로서의 적합 여부를 살펴보게 하였다.

강화천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1232년 2월부터이다. 당시 재추(宰樞)가 전목사(典牧司)에 모여 천도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5월 재추와 4품 이상의 문 · 무관이 회합해 몽골에 대한 방어책을 다시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도 또한 정무(鄭畝) · 태집성(太集成) 등만이 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관료들 대부분은 개경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6월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 도망해 온 교위 송득창(宋得昌)이 몽골군이 곧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천도론은 급진전하였다. 최우는 모든 재추를 불러 강화천도의 뜻을 밝혔고, 회의 참석자 대부분은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지정사 유승단(兪升旦)이 국가를 위해서도 개경은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야별초 지유 김세충(金世冲)도 개경의 전략적 이유를 들어 천도를 반대하다 최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처럼 최우에 의해 주도된 천도 계획은 곧 왕에게 보고되어 7월 6일 왕이 개경을 떠남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로 천도하는 것에 대해 최우의 몇몇 측근 세력을 제외한 관리들 대부분은 반대했다. 또한 왕이 최종적으로 문무 관료를 거느리고 강화도로 떠난 그날 어사대(御史臺) 조예(皂隸) 이통(李通)이 경기(京畿)의 초적과 성(城) 중의 노예나 여러 절의 승도 등으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개경 수호를 결의하고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최우는 강압적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최우는 천도를 결정한 다음 날 군대를 강화도에 보내 궁궐을 짓게 하였다. 강화천도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과 관아 등의 시설은 천도 이후 백성들의 고된 공역을 통해 갖추어졌다. 즉, 천도 2년 뒤인 1234년(고종 21) 여러 지방에서 징발된 민정(民丁)들의 노력으로 궁궐과 여러 관청이 세워졌다. 1251년(고종 38)에는 국자감(國子監)이, 1255년(고종 42)에는 태묘(太廟)가 세워져, 그 규모에 있어서는 개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점차 국도다운 시설들이 갖춰지게 되었다.

강화의 방비 시설로는 내성(內城) · 중성(中城) · 외성(外城) 및 연안의 제방(堤防) 등이 있었다. 현재의 강화읍 일대에 축성된 내성은 1232년 강화천도와 함께 쌓은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남산과 대문현(大門峴)을 걸쳐 동남쪽 일대를 둘러싼 외성은 천도 이듬해에 착공하여 1237년(고종 24)에 증축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강화읍에 있는 중성은 최항(崔沆) 집권기인 1250년(고종 37)에 쌓아 주위가 2,960여 칸(間)에 대소 문이 17개가 있었다. 그리고 연안의 제방은 1235년 주군(州郡)의 일품군(一品軍: 공역군(工役軍))을 징발해 구축한 것으로, 당시 광주(廣州)와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 등지의 백성을 옮겨 도성의 충실을 꾀하였다.

그런데 최 씨 정권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며 신음했던 것과는 달리 강도에서의 생활이 자못 호화로웠다. 최우는 자기 집을 지을 때 도방(都房)과 군대를 동원하여 개경으로부터 목재를 실어 나르게 했으며, 또 백성을 징발해 서산(西山)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는데 여름철에 쓸 어류(魚類)를 저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들도 피난 생활에도 불구하고 저택과 사원을 짓고 팔관회 · 연등회 · 격구 · 명절 등을 즐기면서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고려는 최우 · 최항 · 최의(崔竩) 집권기와 뒤이은 김준(金俊) · 임연(林衍) · 임유무(林惟茂) 집권기까지 강도에서 장기 항전을 펼쳤다. 1258년(고종 45) 최 씨 정권이 몰락하고, 1270년(원종 11) 5월 23일(임술) 재추들이 모여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논의하면서 강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몽골군이 그동안 자행했던 살육과 포로 등으로 인한 인명 손실뿐 아니라 많은 재화의 약탈, 특히 우마 등 가축의 상실은 당시 농민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또한 전국이 몽골군에 유린당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국보급 국가유산의 손실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제작된 금속활자(金屬活字)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상감청자(象嵌靑瓷) 등에서는 발전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또한 몽골과 화의한 원종(元宗)이 개경 환도를 선포하자 최우 정권에서 설치한 삼별초(三別抄)가 이에 반대하면서 강도를 떠나 진도(珍島)에서 몽골에 대한 항쟁을 이어갔다. 이것이 바로 ‘삼별초의 항쟁’이다.

의의 및 평가

강화천도는 몽골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전략적 측면,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 그리고 지방 사회의 저항으로부터 도피 등 그 배경은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강화천도가 아무리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본토에 대한 대책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권 유지 차원으로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최 씨 정권은 강화천도 이후에는 그곳의 방위에만 주력했을 뿐 다른 지역이 침략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또한 천도 이후 취한 일련의 조처는 몽골군을 크게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 부족과 몽골군의 살육 · 약탈로 인해 최 씨 정권은 초적을 비롯한 지방 군현민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다.

대몽 전쟁기 지방 사회의 동요 양상은 강화천도를 전후하여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몽골이 침입하자 일반 민은 초기에 중앙 정부와 결합하여 일시적으로 적극적인 대몽 항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사회의 저항은 최 씨 정권의 강화천도를 계기로 하여 점차 반정부적인 양상을 보여 주면서, 한편으로 몽골에 대한 자위적인 면에서 적극적인 항쟁을 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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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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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채혁,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 몽골·고려 전쟁사 연구의 시각문제」(『애산학보』 8, 애산학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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