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윤인(尹繗)은 승천부 부사(昇天府副使)로서 1231년(고종 18) 12월에 녹사(錄事) 박문의(朴文檥)와 더불어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맨처음 건의하였다. 윤인과 박문의가 강화천도를 건의한 배경은 1231년(고종 18) 11월 안북부전투(安北府戰鬪)에서 고려 삼군(三軍)이 패하고 그해 12월 초에 탕꾸[唐古]등이 지휘하는 몽고군 별동대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 조정이 몽고에 화의를 요청하여 몽고군을 철수시키고 재항전을 모색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윤인과 박문의는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자 몰래 가족과 재산을 강화도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를 만나 강화도가 난을 피할 만한 최적의 장소라고 주장했다. 최우는 이를 검토하기 위해 두 사람을 먼저 강화도로 보냈지만, 도중에 몽고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최우가 윤인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어 이후 1232년 2월부터 강화천도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급기야 6월에는 화의론(和議論)과 개경고수론(開京固守論)을 억누르고 전격적인 강화천도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