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초명은 유원순(兪元淳)이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요속(僚屬)으로 선발되었다가 1190년(명종 20) 5월 과거에 급제하여 시학(侍學)이 되었으나,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강종이 강화로 추방되자 유승단도 또한 배척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희종 때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의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었으나, 유수 최정화(崔正華)와 틈이 생겨 퇴직하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었다가 뒤이어 사부(師傅)가 되었다.
1223년(고종 10)에 6월 예부시랑 우간의대부(禮部侍郎右諫議大夫)가 되었고, 1227년 9월에 수찬관(修撰官)으로서 최보순(崔甫淳)·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였으며, 그 이듬해 12월 추밀원부사 좌우산기상시(樞密院副使左右散騎常侍)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에 올랐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하여 1232년(고종 19) 8월 세상을 떠났다.
1232년에 최우(崔瑀)가 재추(宰樞)를 소집하여 강화천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말을 못하였으나 다만 그만이 종사(宗社)를 버리고 섬에 숨어 구차히 사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반대하였다.
유승단은 성품이 침착하고 겸손하며 박문(博聞)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특히, 고문(古文)에 정교하여 세상에서 ‘원순(元淳)의 문장’이라고 일컬을 정도였으며, 경사(經史)에도 조예가 깊어 뜻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하여 의심이 없게 하였으며, 불전(佛典)에도 능통하였다.
일찍이 상서 박인석(朴仁碩)으로부터 신주(神柱)와 같은 존재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유승단의 시문은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 등에 전해진다. 그는 1224년(고종 11) 3월 국자시(國子試), 1226년 4월에는 비서감으로, 1230년 3월에는 정당문학으로 두 차례 예부시를 주관한 바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