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년(성종 11)에 관료제를 정비하고 그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자제를 교육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성종이 당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이 이때 처음 설립된 것은 아니었고, 태조 때부터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학(國學)을 두었다. 성종은 관료제 정비와 그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하여 중앙 교육을 강화하였다. 지방 세력의 자제를 개경에 불러 교육하고 교육과 과거를 연계시키기 위하여 992년(성종 11)에 국자감 건물을 새로 건립하였다.
국자감은 성균관과 같이 문묘와 학사로 구성되었다. 문묘는 선성전(宣聖殿: 대성전)과 좌우에 양무(兩廡)가 있었고, 학사는 강당인 돈화당(敦化堂)과 기숙사인 재사(齋舍)가 있었다.
그러나 국자감 교육이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성종 이래로 국자감에 지방 세력의 자제들이 많이 입학하였고, 1036년(정종 2)에 국자감 학생들은 입학 후 만 3년이 되어야 감시(監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 응시를 위하여 국자감에서 수학하는 것이 필수가 아닌 상황이 되자 중앙 관료의 자제들이 국자감 입학을 회피하면서 국자감 교육이 침체하게 되었다.
문종 때는 국자감 학생들 가운데 학업을 태만히 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반면 중앙 관료의 자제들은 사학(私學)에서 과거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현상으로 숙종 때에는 국자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국자감 교육을 새롭게 한 임금은 예종과 인종이었다. 예종은 1109년(예종 4) 송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기존의 유학부 외에 유학을 가르치는 전공별 강좌인 7재(七齋)를 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1110년(예종 5)에 제술업 · 명경업의 감시에 응시하는 자는 국자감에서 3년간 300일을 출석하여 국자감에서 수학하는 것을 의무화함으로써 국자감 교육을 정상화하였다. 1119년(예종 14)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도 설치하였다.
무신정권기에는 국자감 교육이 전반적으로 침체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고려의 제도를 제후국의 위격에 적합하도록 개편하라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유학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생겨나 1304년(충렬왕 30)에 대성전을 새로 건축하였고, 국학 진흥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안향의 건의로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298년, 충렬왕에게 양위받은 충선왕이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성균감(成均監)으로 개편하였고, 충선왕이 폐위되면서 국학으로 되돌아간 것을 1308년에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成均館)으로 개편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반원정치의 일환으로 국자감으로 복구하였으나, 1362년(공민왕 12)에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다. 1367년(공민왕 17)에 성균관 건물을 중영하고 성리학을 교육하였으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운영하였다.
성종 대 국자감은 성균사업과 국자학 · 태학 · 사문학 등 유학부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문종은 당나라 제도는 물론 송날 제도까지 도입하여 국자감을 종합대학으로 정비하였다.
학교 운영의 자문 역할을 겸직한 제거(提擧) · 동제거(同提擧) · 관구(管勾) · 판사(判事), 학교를 운영한 좨주(祭酒, 종3품) · 사업(司業, 종4품) · 승(丞, 종6품) · 주부(注簿, 종7품), 5학의 학관으로 국자학 · 태학 · 사문학 등 유학부의 박사(博士, 정7품~정8품)와 서학 · 산학 등 기술학부의 박사(종9품), 그리고 학생 교육과 학사 운영을 보좌한 학정(學正, 정9품) · 학록(學錄, 정9품) · 학유(學諭) · 직학(直學)을 두었다.
예종이 국자감의 유학부와는 별개로 설치한 7재는 여택재(麗澤齋: 주역) · 대빙재(待聘齋: 상서) · 경덕재(經德齋: 모시) · 구인재(求仁齋: 주례) · 복응재(服膺齋: 대례) · 양정재(養正齋: 춘추) · 강예재(講藝齋: 무학)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국자감에서 유학 교육을 받는 학생은 유학부의 일반 학생과 7재의 학생으로 구별되었다. 국자감의 유학부는 입학시험이 없었으나 7재는 승보시(升補試)에 급제하여야 입학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국자감 교육이 강화되면서 1116년(예종 11)에 좨주 위에 대사성(大司成, 종3품)을 새로 두었다. 무학재가 관직을 쉽게 얻는 통로가 되면서 문제가 되자 1133년(인종 11)에 폐지하였다. 인종은 국자학 · 태학 · 사문학의 유학부와 율학 · 서학 · 산학의 기술학부 등 6학의 종합대학으로 정립하였고, 인종 후반에 명경학을 더하여 7학이 되었다.
이후 충렬왕의 국학, 충선왕의 성균감을 거쳐 성균관이 되면서 유학대학으로 바뀌었다. 직제로는 좨주 · 악정(樂正) · 승이 학교를 운영하였고, 3학의 학관으로 성균박사(成均博士) · 순유박사(諄諭博士) · 진덕박사(進德博士)가 있었으며, 학정 · 학록 · 직학 · 학유가 학생 교육과 학사 운영을 보좌하였다. 기술학부는 제외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종합대학인 국자감으로 복구하였으나 직제는 고려 전기와 달랐다. 대사성(정3품) · 좨주(종4품) · 사업(종4품) · 직강(종5품)이 학교를 운영하였고, 학관으로 국자학 · 태학 · 사문학과 명경학, 그리고 율학 · 서학 · 산학 등 7학의 박사(정7품~종9품)와 명경학유(종9품) · 율학조교(종9품), 학생 교육과 학사 운영을 보좌한 학정(정9품) · 학록(정9품) · 직학(종9품) · 학유(종9품)를 두었다. 1367년(공민왕 11)에 성균관으로 개편하였다.
성종 대, 국자감은 지방 세력의 자제를 불러 교육하였다. 입학 자격은 분명하지 않으나 중앙 관료와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인종 대의 학식(學式)에 따르면 유학부와 기술학부의 입학 자격이 달랐다.
유학부의 국자학생(國子學生)은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태학생(太學生)은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사문학생은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이 입학하도록 하였다. 관료들의 출신 가문과 상관없이 그들의 관료제 상의 품계와 연계하여 자손을 입학시키는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이 그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잡로(雜路)나 공장 · 상인 · 악공 등의 천한 일을 하는 자, 대공친 또는 소공친과 혼인한 자, 가도(家道)가 바르지 않은 자, 극악무도한 일을 범하여 귀향간 자, 천한 향곡인 · 부곡인 등의 자손, 자신이 사사로운 죄를 범한 자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술학부의 율학생 · 서학생 · 산학생은 주현의 학생과 8품 이하의 아들 및 서인, 7품 이상의 아들로 원하는 자들이 입학하였다. 유학부는 관료 자손에 제한된 반면에 기술학부는 관료의 아들은 물론 향리의 자제, 서인까지 입학할 수 있어 입학 대상의 범주가 넓었다.
정원에 대한 규정은 유학부인 국자학 · 태학 · 사문학은 각각 3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합쳐서 300명으로 추정되며 실제는 200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7재생은 처음에 유학 70명, 무학 8명을 선발하였으므로 70~80명 정도이고, 율학 · 서학 · 산학의 기술학부는 조선 시기를 근거로 70명 정도로 추정한다.
교육 과정을 보면 필수과목인 『 논어』와 『 효경』은 합쳐서 1년, 전공과목에 해당하는 『상서(尙書)』 · 『공양전(公羊傳)』 · 『곡량전(穀梁傳)』은 각 1년 반, 『 주역(周易)』 · 『 모시(毛詩)』 · 『 주례(周禮)』 · 『 의례(儀禮)』는 각 2년, 『 예기(禮記)』 · 『좌전(左傳)』은 각 3년을 연한으로 수업하였다.
『논어』와 『효경』을 먼저 필수로 읽었고 전공의 경전들은 선택하여 읽었다. 아울러 산술과 시무책을 공부하였다. 글씨를 연습하였고, 『국어(國語)』 · 『설문(說文)』 · 『자림(字林)』 · 『삼창(三倉)』 · 『 이아(爾雅)』도 읽었다.
정종은 국자감 학생은 3년 동안 수학해야 감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종 대에 유생(儒生)은 9년, 율생(律生)은 6년으로 수업 연한을 제한하고 학업에 진전이 없으면 퇴학하도록 한 것을 근거로, 수업 연한은 최소 3년에서 9년까지로 보고 있다. 국자감 교육은 과거 준비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생이 과거에 급제하면 언제든지 학업이 끝났다.
국자감은 성종 대부터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하지만 국자감 교육과 과거가 제도적으로 연동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중앙 관료의 자제들은 사학을 통해 과거를 준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종이 제술업과 명경업의 감시에 응시하려면 국자감에서 3년간 300일을 출석하도록 규정하면서 비로소 국자감의 교육과 과거가 연계되었다.
국자감의 교육과 과거의 연계는 7재 학생들이 받은 과거 응시의 특혜에서 더 분명히 나타났다. 7재 학생들은 평소의 행실 및 학업 수준에 따른 행예(行藝)를 평가받거나, 국자감 내의 시험인 사시(私試), 즉 고예시(考藝試)의 성적에 따른 평가를 받았고, 이를 근거로 과거 응시에 특전을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인종 이후 나타났다. 행예와 관련해서는 1136년(인종 14)에 행예의 분수(分數)가 14분 이상이면 과거의 제삼장에 곧장 응시하고 13분 이하 4분 이상이면 시부장(詩賦場)에 응시하게 하였다. 1154년(의종 8)에도 6행(六行)을 살펴 14분 이상을 쌓은 자는 곧장 종장에 응시하게 하였다.
매달 시험을 보고 계절마다 종합 시험을 치렀던 것으로 보이는 고예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자도 특전을 받았다. 1135년(인종 13)에 인종은 사계절에 사시를 치르고 분수를 헤아려 곧장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7재 학생들에게 과거 응시의 특전을 주는 제도는 이후 지속되었다.
국자감은 성종이 관료로 선발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이다. 처음부터 학생들의 과거 준비를 도와줄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과거는 중앙과 지방의 지배층 자제들이 시험을 치러 관료로 선발되는 제도로서, 고대에 없던 새로운 인재 선발 방식이었다.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이라는 점에서 국자감은 고대의 학교 교육과는 다른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는데, 7재가 설치되면서 유학 교육이 크게 장려되었으나 국자감의 인재 교육이 유학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자감 교육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