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는 5경의 하나로, 고대 중국의 예에 관한 기록과 해설을 정리한 유교경전이다. 시경·서경·역경·춘추와 더불어 5경을 이룬다. 공자 사후, 예를 숭상하던 스승의 뜻을 존숭한 그 제자들에 의해 예에 대한 기록이 쌓여 갔고 그것을 대덕과 대성이 수집·편찬하여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를 편찬했는데 이것이 예기의 시초이다. 후에 정현이 『주례』·『의례』와 함께 소대례기에 주석을 붙여 삼례라 칭하게 된 후 소대례기가 『예기』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예악의 흥성과 함께 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
오경(五經)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예경(禮經)이라 하지 않고 『예기』라고 한 것은 예(禮)에 대한 기록 또는 주석(註釋)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그 설이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공자는 삼대(三代 : 夏 · 殷 · 周) 이래의 문물 제도와 의례(儀禮) · 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스스로의 책무로 삼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예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공자 사후 각 국으로 흩어져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한 제자들에 의해 예에 대한 기록이 쌓여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생전의 스승에게서 들은 이야기, 학설, 스승과 나눈 대화 등을 문자로 정착시켰고,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기도 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자의 제자, 또는 그 문류(門流) 후학들에 의해 기록된 예설(禮說)들이 늘어나서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200여 편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때쯤에는 전문적으로 예학(禮學)을 연구하는 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덕(戴德) · 대성(戴聖)은 흩어져 있는 예설들을 수집, 편찬한 사람들이다. 대덕은 자를 연군(延君)이라 하는데 대대(大戴)라 일컬어지며, 대성은 자를 차군(次君)이라 하는데 소대(小戴)라 일컬어진다. 대덕과 대성은 숙질간으로 대덕이 대성의 작은아버지가 된다. 두 사람 모두 한나라의 선제(宣帝) 때 학자인 후창(后倉)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한나라의 뛰어난 학자인 정현(鄭玄)의 『육예론(六藝論)』에는 “지금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는 대덕과 대성의 학(學)이다. 대덕은 기(記) 85편을 전하였으니 곧 대대례(大戴禮)이고, 대성은 예 49편을 전하였으니 곧 이 예기(禮記)다.”라 하여, 예기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대덕의 85편은 대대례기, 대성의 49편은 소대례기로 일컬어졌다. 정현이라는 큰 학자가 나와 『주례(周禮)』 · 『의례(儀禮)』와 함께 소대례기에 주석을 붙여 삼례(三禮)라 칭하게 된 후 소대례기가 『예기』로 행세하게 된 것이다. 대대례기는 흩어져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40편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대대례기 85편에서 49편을 정리, 편찬한 것이 소대례기인지, 아니면 이 두 『예기』가 각각 별개로 편찬되어 전승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대개 후자로 보는 것 같다.
정현은 『예기』를 주석하면서 자주 신중하고 엄밀한 학문적 자세를 취해 원전을 존중하였고, 잘못임이 분명한 대목일지라도 원문의 글자를 고치지 않고 대신 주석으로 자세하게 지적해 두는 데 그쳤다. 이러한 정현의 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같은 학자는 “예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 그를 높이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공영달은 당태종의 명을 받아 『오경정의 五經正義』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예기정의(禮記正義)』 편찬에 있어서는 정현의 주를 바탕으로 웅안생(熊安生) · 황간(皇侃)의 『의소(義疏)』를 참작해 독자적인 정리를 하였다. 이후로 『예기』는 정주공소(鄭注孔疏)라 해서 정현의 주와 공영달의 소가 원전 못지 않게 존중되었다.
『예기』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잡다하게 기록한 것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체계가 없고 번잡한 느낌이 없지 않으며 편차(編次)의 배열도 일정한 원칙이 없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은 별록(別錄)―지금은 없어졌지만 공소(孔疏)에 인용된 정현의 정목록(鄭目錄)에 의해 내용의 일부분을 알 수 있다―에서 내용에 따른 분류를 하고 있다. 통론(通論)에 해당하는 편은 ③ · ④ (원전 편차임.) 단궁(檀弓) 상하, ⑨ 예운(禮運), ⑬ 옥조(玉藻), 대전(大傳), 학기(學記), 경해(經解), 애공문(哀公問), 중니연거(仲尼燕居), 공자한거(孔子閑居), 방기(坊記), 중용(中庸), 표기(表記), 치의(緇衣), 유행(儒行), 대학(大學)이다.
제도(制度)를 내용으로 하는 편은 ① · ② 곡례(曲禮) 상하, ⑤ 왕제(王制), ⑩ 예기(禮器), 소의(少儀), 심의(深衣), 명당음양기(明堂陰陽記)는 ⑥ 월령(月令), ⑭ 명당위(明堂位)이고, 상복(喪服)에 관한 기록은 ⑦ 증자문(曾子問), ⑮ 상복소기(喪服小記), · 잡기(雜記) 상하, 상대기(喪大記), 분상(奔喪), 문상(聞喪), 복문(服問), 간전(間傳), 삼년문(三年問), 상복사제(喪服四制)이다. 세자법(世子法)은 ⑧ 문왕세자(文王世子)이고, 자법(子法)은 내칙(內則)이고, 제사(祭祀)에 관해서는 교특생(郊特牲), 제법(祭法), 제의(祭義), 제통(祭統), 길례(吉禮)로는 투호(投壺), 향음주의(鄕飮酒義)이고, 길사(吉事)로는 관의(冠義), 혼의(昏義), 사의(射義), 연의(燕義), 빙의(聘義)이고, 악기(樂記)로는 악기(樂記) 등이다.
『예기』의 판본은 원문(原文, 經文)만을 수록한 것, 원문과 주석을 합록한 20권본(本), 정의(正義)만 수록한 단소본(單疏本) 70권, 원문 · 주 · 소를 모두 수록한 63권본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명나라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아 찬집한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30권이 널리 읽혀지고 또한 판각도 되었다. 이는 원래 『오경대전(五經大全)』의 하나로, 수록된 판본이기도 하다.
『예기』가 우리 나라에 어느 때 전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나 『주서(周書)』 등에 “서적으로는 오경(五經)이 있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수용된 듯하며 통일신라 이후로는 관리 등용 시험에 필수 과목이 되는 수가 많았다. 우리 나라 학자에 의한 주석은 고려 말 권근(權近)의 14년에 걸친 연구의 결실인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26권 11책)이 첫 번째 저술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예학의 흥성과 함께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