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바로 눈앞에 동해바다가 펼쳐지는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 바람소리를 연상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는 때로 송정(松亭)·녹정(彔亭)·두정(荳亭)·녹두정(綠荳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정자가 언제 세워졌는지, 또 언제 없어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정자와 인접한 곳에 한송사(寒松寺)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 지도들은 이곳을 한송사 때로는 한송정으로 표기하고 있어 혼동할 여지가 없지 않으나 정자와 사찰의 개체는 분명 다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한송정이 있던 자리 곁에 차우물[茶泉 또는 茶井]·돌아궁이[石竈]·돌절구[石臼] 등이 있었는데 이를 화랑의 다도유적(茶道遺蹟)이라 하였고, 또 이 유적지를 가리켜 술랑선인(述郎仙人), 즉 화랑도들이 노닐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한송정을 두고 읊은 고려 고종 때 장진산(張晉山)의 〈한송정곡 寒松亭曲〉이 《악부 樂府》에 전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안축(安軸)·이인로(李仁老)·김극기(金克己)·권한공(權漢功)·이무방(李茂芳)·유계문(柳季聞) 등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지(地理志)들은 한송정이 관동팔경(關東八景)에 들지는 못하지만,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鏡浦臺)와 함께 강릉을 대표하는 명구(名區)로 이 정자를 꼽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상고해 보면, 한송정이 생겨난 시원을 신라의 화랑도가 생성되는 시기(진흥왕 37년, 576)인 6세기 후반으로 본다면, 그 생성 상한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던 시기(조선 초기)에는 폐허가 되어 있음을 상상하게 해 준다.
그러나 한송정은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고지도(古地圖)와 강릉지역 고로(古老)들의 문집(文集) 등을 살펴보면 19세기 말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과거의 지리지를 비롯한 기록들이 술랑(述郎)과 4선인(四仙人 : 永郎·述郎·南郎·安祥) 등 화랑도들이 노닐었던 곳으로 설명한 것은 명승지에 대한 부회(附會)라고 할 것이지만, 오늘날은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동해안을 지키는 작은 군사기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화랑도가 노닐던 곳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송정의 유물로 전해지는 차샘·돌아궁이·돌절구 등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돌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고 있다.
돌절구에는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가 가장자리에 ‘新羅仙人永郎鍊丹石臼(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 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는데 돌절구라는 이 석구는 형태나 형식으로 보아 절구가 아니라 비석을 꽂아 세우기 위한 밑받침돌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