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는 13경의 하나로, 관혼상제 등의 예법을 기록한 유교 경전이다. 『주례』, 『예기』와 함께 삼례로 일컬어진다. 당나라 문종 때 9경을 석각(石刻)하면서 『주례』, 『예기』, 그리고 이 책을 합해 3례라고 일컬으면서 『의례』라는 책명이 정식으로 붙게 되었다. 『의례』 17편은 사관례, 사혼례, 사상견례, 향음주례, 향사례, 연례, 대사의, 빙례, 공식대부례, 근례, 상복 등이다. 의식의 진행을 규정한 내용으로 전편에 세목을 붙어 자세하게 설명했다. 『의례』의 주석은 후한의 마융(馬融)이 처음 상복편을 주해하였고, 정현에 비로소 17편 전서를 주석하였다.
13경 중의 하나이다. 『주례(周禮)』 · 『예기』와 함께 삼례(三禮)로 일컬어진다. 『한서(漢書)』 「예문지」에 “예(禮)는 고경(古經) 56권과 경 70편”이라고 쓰여저 있다.
고경 56권이란 “노나라 엄중(淹中)에서 나온 것인데, 내용은 공씨(孔氏) 70편과 비슷하지만 도리어 39편이 더 많다.” 고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엄중이란 마을 이름이고 ‘엄중에서 나왔다.’는 것은 하간헌왕(河間獻王)이 얻었다고 전해지는 『고문의례(古文儀禮)』를 뜻한다.
그리고 공씨 70편이라 하는 것은 공씨댁(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노나라 공왕(共王)이 찾아냈다고 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70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17편의 잘못이며, 17편에 39편을 더하면 56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례』 17편은 『금문의례(今文儀禮)』이다. 『고문의례』는 『금문의례』보다 39편이 많지만, 없어진 지가 오래 되어서 그 목차나 내용을 알 길이 없다. 『금문의례』 17편이 오늘날 말하는 『의례』이다. 이는 고당생(高堂生)이라는 사람이 연구해 전한 것이라 한다. 『사기』 유림전(儒林傳)에 “여러 학자가 많이 예를 말했지만, 노나라 고당생이 가장 뛰어났다.
예는 공자 때부터 정립이 되었으나 그 경(經)이 갖추어지지 못했는데 진(秦)에 이르러 서적들을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흩어지고 없어진 것이 더욱 많다. 지금에 있어서는 오직 사례(士禮)가 있을 뿐인데, 고당생이 알고 있다.” 고 하였으며 여기서 말하는 사례가 곧 『의례』이다.
앞에 든 『한서』 예문지에도 “한(漢)이 일어나자 노나라 고당생이 사례 17편을 전했고, 선제(宣帝) 때에는 후창(后倉 혹은 后蒼)이 가장 밝았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 『의례』 17편이 ‘사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첫편이 사관례(士冠禮)이기 때문에 사례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敍錄)』에 “정현(鄭玄)이 『의례』 17권을 주석하였다.”고 쓰여 있어 ‘의례’라는 이름이 정현이 살았던 후한 때 이미 붙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현이 『예기』를 주석한 어구들에는 단지 ‘금례(今禮)’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의례’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금례란 ‘지금 보존되고 있는 예’라는 뜻인 것이다.
의례라는 책명을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당나라 때 원도(元度)의 『구경자양(九經字樣)』이라는 책에서 이다. 당나라 문종의 개성연간(開成年間, 836∼840)에 9경을 석각(石刻)할 때 『주례』 · 『예기』, 그리고 이 책을 합해 3례라고 일컬으면서 『의례』라는 책명이 정식으로 붙게 되었다.
『의례』의 전승에 관해서는 『한서』 예문지에 노나라 고당생이 전했다고 되어 있고, 한나라 선제 때 이르러서는 후창이 의례에 가장 통달했고, 대덕(戴德,세칭 大戴) · 대성(戴聖, 세칭 小戴) · 경보(慶普)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며 모두 학관(學官)으로 임명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므로 대덕 · 대성 · 경보 세 사람은 최초의 의례박사(儀禮博士)로서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데 공헌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의례』 17편은 『예기』 · 『주례』와 함께 예가(禮家)의 경전으로 존중되고 연구되었다.
『의례』 17편은 사관례 · 사혼례(士昏禮) · 사상견례(士相見禮) · 향음주례(鄕飮酒禮) · 향사례(鄕射禮) · 연례(燕禮) · 대사의(大射儀) · 빙례(聘禮) · 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 · 근례(覲禮) · 상복(喪服) · 사우례(士虞禮) · 특생궤식(特牲饋食) · 소뢰궤식(少牢饋食) · 유사철(有司徹) 등으로 자세한 의식 절차를 서술해 놓았다.
상복편을 제외하면 의식의 진행을 규정한 내용이어서 시작에서 끝마침에 이르기까지 세목을 모두 들고 있으며, 복장 · 기구(器具) 등도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의례』의 문장은 아주 세밀하고 간결한 편이며 문자의 이동(異同)이 심하지 않은 것으로 고증이 되고 있다.
1959년에 발견된 한묘(漢墓)에서도 『의례』의 한간(漢簡)이 출토되었지만,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례』와 비교해 큰 이동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로써 보면, 애초에 고당생이 전한 원형이 비교적 훼손됨이 없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의례』 17편 중 사상견례 · 대사례 · 소뢰궤식례 · 유사철 4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13편에 모두 기(記)가 있고, 「상복편」은 경문(經文)을 장(章)으로 나누어 장마다 말미에 자하(子夏)의 전(傳)을 붙여놓았으며, 기문(記文) 뒤에도 자하의 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애초의 경문은 공자가 정리해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며, 기문은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고, 이를 반박해 자하는 공자의 제자인 복상(卜商)이 아니라, 한나라 사람으로 자(字)를 자하라 일컬은 사람이라고 주장한 학자도 있다.
『의례』의 주석은 후한의 마융(馬融)이 상복편을 주해한 것이 처음이고, 정현에 이르러 비로소 17편 전서를 주석하였다. 정현은 특별한 사승(師承)관계도 없이 난해한 『의례』 전서를 주석해 “정현이 없었다면 『예경』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권위를 발휘하였다.
전한 이래 다른 유교경전에 대해서는 주석 작업이 활발했지만, 유독 『예경』은 손대는 학자가 없더니 정현이 나와 결정적인 분석과 체계를 세웠다는 평을 들었으며 오늘날까지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다만, 주석에 참위설(讖緯說)을 혼합시킨 것이 옥의 티라는 말을 듣고 있다. 이에 덧붙여 당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疏)도 진중되고 있다.
이밖에 참고도서로 송나라 섭숭의(聶崇義)의 『삼례도(三禮圖)』, 청나라 장혜언(張惠言)의 『의례도(儀禮圖)』가 있고, 청나라 호배휘(胡培翬)의 『의례정의(儀禮正義)』는 여러 예가의 설을 종합, 정리하고 있어 이론 체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