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유교경전이다. 공자 사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갔던 문답을 중심으로 ‘학이편’부터 ‘요왈편’까지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논어』·『노논어』·『고문논어』 등 여러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전한 말 장우가 편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중국과의 접촉이 활발해지고 통치질서와 정치윤리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가던 삼국시대에 유교의 전래와 함께 전해졌다. 오경보다 사서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시골 벽촌의 어린 학동들까지 배웠을 정도로 중요한 경전으로 자리잡았다.
공자(孔子)는 서기전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서 가난에 시달리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부지런히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에 힘써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20대에 이미 이름을 떨쳐 제자들이 따르게 되었으며, 그의 관심은 예(禮)와 악(樂)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있었다.
당시 노나라는 계손(季孫) · 맹손(孟孫) · 숙손(叔孫)의 삼환씨(三桓氏)가 정권을 농락하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51세 때 대사구(大司寇)까지 역임했으나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뒤 천하를 다니면서 정치적 혁신을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68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후진 육성에 힘썼다.
공자는 인(仁)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예로 표현되는 사회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려 하였다. 만년에 육경(六經) 편찬에 힘쓴 것은 후세에게나마 그의 이상을 전하고 실현을 기약하려는 뜻에서였다.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그의 사상은 실천을 전제로 한 도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따르는 제자가 3천인이 넘었다 하는데, 그 가운데 72인이 뛰어났다고 한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 자하(子夏)를 비롯한 공자의 제자들, ② 자하 · 중궁(仲弓) · 자유(子游) 등, ③ 증삼(曾參)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의 무리, ④ 증삼과 유자(有子)의 문인 등이 그것인데, 『논어』가 공자 자신의 손으로 기록, 정리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논어』라는 책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은 “이 책은 공자의 문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자세히 따진 뒤에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야 기록했으므로 ‘논(論)’이라 하였다. ‘어(語)’란 논란에 대해 대답하고 설명한다는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원(元)나라의 하이손(何異孫)은 ‘논어’가 “글뜻을 토론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 했고, 청(淸)나라의 원매(遠枚)는 “논이란 의논이란 뜻이며 어란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풀이해서 의견이 다양하다.
『한서』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는 세 가지 종류의 『논어』가 전해오고 있었다 한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제논어, 노(魯)나라에서 전해 온 노논어, 그리고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가 그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전한 말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편찬한 교정본(校定本)이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나뉘어 있고, 각 편의 머리 두 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첫 편인 학이(學而)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따 왔다. 따라서 『논어』의 내용 구성은 ‘배움’에서 시작해 ‘하늘의 뜻을 아는 것(知命)’까지로 되어 있다. 『논어』의 내용은 ① 공자의 말, ②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③ 공자와 당시 사람들과의 대화, ④ 제자들의 말, ⑤ 제자들간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들 모두는 공자라는 인물의 사상과 행동을 보여주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과의 접촉이 활발해지고 통치질서와 정치윤리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가던 삼국시대였다. 『논어』도 이 무렵에 전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642년에 죽죽(竹竹)이라는 화랑이 인용한 『논어』의 구절이 보인다. 설총(薛聰)이 구경(九經)을 이두로 읽었으며 강수(强首)가 불교보다 유교의 도리를 배우겠다 하여 뒤에 외교문서 작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실은 유교적 교양의 바탕인 『논어』가 당시에 이미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682년(신문왕 2)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 과목이었다.
고려조에 들어와 문묘(文廟)와 석전의 의례를 갖추는 한편, 사회적 · 정치적 제도를 정비한 성종은 990년(성종 9) 서경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해 전적과 문헌을 수집하게 했는데, 물론 『논어』도 여기에 수장(收藏)되었다. 이 무렵 서적의 인쇄와 역사서 편찬, 그리고 궁중의 경연이 성했는데, 『논어』는 경연에서 자주 거론된 경전이었다.
조선시대는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를 중요시하는 주자학이 사상 · 문화 전반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사서의 중심인 『논어』는 시골 벽촌의 어린 학동들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의 문인 이덕홍(李德弘)의 『사서질의(四書質疑)』가 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 뒤 학자들의 주석이 수없이 많지만 대개는 단편적인 글귀에 대한 나름의 의문과 해석, 아니면 공자의 인격에 대한 찬탄에 그치고 있다. 한(漢) · 당(唐)의 훈고와 송(宋) · 명(明)의 의리(義理)에 매이지 않고 문헌비판적 · 해석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논어』를 해석한 저작이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이다. 한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중국의 거의 모든 학자들과 우리 나라 선비, 그리고 일본의 연구성과까지 검토, 비판해 독자적인 주장을 폈다.
『논어』의 첫 간행은 1056년(문종 10)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 경전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 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 한다. 이어 1134년(인종 12)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시대에 세종은 주자소를 건립하고 『논어』를 포함한 다량의 서적을 간행해서 각 지방에 보급하였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노력은 전래 초기부터 있어 왔다.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은 각각 『논어』에 토를 달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구결(口訣)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