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유빈(柳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경손(柳敬孫)이다. 아버지는 서령 유지성(柳之盛)이며, 어머니는 권득(權得)의 딸이다.
1472년(성종 3)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1489년(성종 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발탁되고 사유록(師儒錄)에 들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내면서 정부 관원들의 기강 확립과 국왕에 대한 간쟁에 힘썼다.
1504년(연산군 10) 국왕의 어지러운 정치를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이와 함께 네 자급(資級)을 뛰어 판결사에 등용되었고, 공조참의로 옮겨져 삼공(三公)들의 주청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이어 성균관대서성·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젊은 문신들에게 전수하였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장(師長)의 자리를 유숭조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삼공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재임되었다.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북돋우었다. 『서경』·『역경』·『예기』에 밝았고, 특히 천문·역상(曆象)에 통달해 자신이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유숭조가 남긴 『칠서언해』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벼슬길에서 보인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언간의 올바른 정신은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 4권, 『대학잠(大學箴)』 1권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