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肅宗) 대에 폐지론이 제기된 국학을 개편하고 문교 진흥과 여진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예종(睿宗)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국학 진흥책이다. 송(宋)의 삼사(三舍) 제도를 수용하여 상사(上舍)에 해당하는 칠재(七齋)를 국학 내에 둔 것이다. 문무 양학을 전문성에 따라 7개의 전문 강좌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유학(儒學)의 6강좌와 무학의 1강좌로 구분하였다. 1109년(예종 4) 처음 칠재를 설치할 당시의 내용과 수학 인원을 살펴보면 〈표〉와 같다.
구분 | 재(齋)의 명칭 | 전문 분야 | 인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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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 | 이택재(麗澤齋) | 주역(周易) | 70명 |
대빙재(待聘齋) | 상서(尙書) | ||
경덕재(經德齋) | 모시(毛詩) | ||
구인재(求仁齋) | 주례(周禮) | ||
복응재(服膺齋) | 대례(戴禮) | ||
양정재(養正齋) | 춘추(春秋) | ||
무학(武學) | 강예재(講藝齋) | 무예(武藝) | 8명 |
〈표〉 1109년 칠재(七齋)의 내용 |
칠재의 설치는 "치학양현(置學養賢: 학제를 설치하여 어진 이를 기르다.) 한다."라는 예종의 교육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예종은 1107년(예종 2)에도 1차적으로 국학 교육의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대신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하였다. 그 뒤 1109년(예종 4)에 비로소 칠재의 교육 개혁안을 제도적으로 확정하였고, 최민용(崔敏庸) 등 70명의 유학생과 한백순(韓白純) 등 8명의 무학생을 수용함으로써 실현하게 되었다.
칠재는 무인 관료군으로서의 장수와 문인 관료군으로서의 재상을 양성한다는 이원적 목표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1116년 4월의 제(制)에 “문무 양학은 국가 교화의 근원이므로 일찍이 명(命)을 내려 제생(諸生)을 양육하게 하여 장래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의 등용에 대비하고자 하였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칠재의 교육 체제는 단순한 교육 개혁의 의미를 넘어 당시의 전통적인 정치 이념에 대한 변화를 반영한다. 성종(成宗) 이래로, 전용문사(專用文事)의 정치 이념 아래에서 국자감(國子監)의 교육 목적은 오로지 문인 관료(文人官僚)의 양성에 있었다. 그러나 예종 때에 이르면, 북방 민족과의 계속된 투쟁 및 긴장 상태로 인해 정치 이념으로 전용문사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1116년(예종 11) 8월의 조서(詔書)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정치 이념이 ‘문무지추 불가편폐(文武之追 不可偏廢)’로 전환되고 있었다. 칠재 중 무학재의 설립은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무인 관료군의 양성을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119년(예종 14) 7월에는 국학 내에 양현고(養賢庫)를 설립해 국학 양사(國學養士)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동시에 학사(學舍)를 설립해 칠재의 교육 정원을 유학생 60명과 무학생 17명으로 개편하였다. 1109년(예종 4)의 칠재와 비교했을 때 유학생은 10명이 감소한 데 비해 무학생은 9명이 증가하였다. 이것은 무인의 지위 향상과도 관련이 있으며, 당시 악화일로(惡化一路)에 있었던 국제 긴장 상태에 대처하려는 정책과도 연계될 수 있다.
무학재 출신들은 관료 진출에 많은 특전을 부여 받았는데, 이는 무학 폐지의 쟁점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학 폐지가 논의되기 시작한 근본적인 이유는 북방 금(金)나라에 대한 사대적 외교 정책으로 무인 관료군의 필요성이 소멸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학재는 1133년(인종 11) 1월 폐지되었다.
칠재의 설치와 운영은 사학(私學)이 발달하고 국학이 퇴조하는 가운데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국학을 개혁하려는 시도의 하나였다. 양현고라는 기금의 설치 등을 통해 전문적이고 안정적인 교육 기반을 마련하려 하였다. 무엇보다 여진의 부상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무학을 전문으로 하는 강예재를 설치한 것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