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은 고려 전기 제1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05~1122년이며, 숙종의 맏아들이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여진정벌에 힘썼다. 윤관·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정복 지역에 구성을 설치했다가 1년 만에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서는 대체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국학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두었으며, 이름난 선비를 뽑아 학관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송의 궁중에서 쓰던 대성악을 들여왔다.
재위 1105∼1122년. 이름은 왕우(王俁). 자(字)는 세민(世民). 숙종(肅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 유씨(柳氏)이다. 후비(后妃)에는 선종(宣宗)의 딸 경화왕후(敬和王后) 이씨(李氏), 이자겸(李資謙)의 딸이자 인종(仁宗)의 어머니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가 있다.
예종은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넓어 학문을 좋아하였다. 동궁(東宮) 시절부터 ‘어진 선비’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군왕으로서의 소양과 정치적 식견을 넓혀 나갔다. 그는 아버지 숙종과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자신이 조정자가 되어 정치세력 간의 세력 균형 및 사상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의 측근으로는 한안인(韓安仁)과 이자겸 등이 있었고, 그 자신과 측근 세력들이 선종(禪宗)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종파 간의 화합을 꾀하고 도교(道敎)에도 관심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 숙종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대한 맹세하는 축원문인 서소(誓疏)를 간직하였다가, 즉위한 뒤 군법(軍法)을 정비하고 신기군(神騎軍)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썼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정복 지역에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다[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흥평야, 길주(吉州), 두만강 북쪽 일대 등 여러 견해가 있음].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족(女眞族)의 침입, 구성 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1109년(예종 4)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해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예종 7)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해 빈민들의 시약(施藥)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예종 10)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해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16년(예종 11)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서(經書)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儒學)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宋)나라로부터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이다.
1117년(예종 12)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라는 글로써 화친(和親)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19년(예종 14) 국학(國學)에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이때 유사(有司)에게 명해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명과 무학(武學) 17명으로 하며, 이름난 선비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더니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났다. 1120년(예종 15)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태조(太祖)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을 추도해 이두문(吏讀文)으로 된 향가(鄕歌) 형식의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1122년(예종 17) 4월에 죽자, 태자(太子) 왕해(王楷: 인종)가 즉위하였다.
능(陵)은 개성(開城)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