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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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개념
고려와 조선시대에 궁중과 상류층에서 연주되던 전통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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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궁중과 상류층에서 연주되던 전통음악.
내용

민속악(民俗樂)에 대비되는 궁중음악의 총칭이다. 따라서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는 ‘협의의 아악’, 후자는 ‘광의의 아악’이라고 하며, 여기서는 협의의 아악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악은 원래 중국 고대의 음악으로 1116년(예종 11)에 송나라에서 들어온 뒤, 즉시 태묘(太廟) 등의 제례악으로 채택되었으며 그 이후 계속하여 왕실의 대중사(大中祀)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식 중 지금은 성균관의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문묘제례악>이 현존하는 유일한 아악인 셈이다.

아악은 도입기로부터 다소 변모되어 다음의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고려사≫ 악지 아악조에서 볼 수 있듯이, 송에서 도입한 <대성아악 大晟雅樂>을 비교적 원모습대로 사용하는 고려 예종에서 의종에 걸치는 시기이며, 제2기는 악기와 악식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하고 원모습을 잃어가는 시기로, 고려 명종 때부터 조선 세종 초까지를 말한다.

제3기는 조선 건국 초 혼란이 안정되어 문물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아악을 독자적으로 복원하여 그 용도가 사회에까지 확대되는 세종 때로, 이 때는 아악이 융성의 극에 달하였다.

제4기는 세종 때에 완비된 아악이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현저히 위축되는 시기이다. 이상을 구체적으로, 아악이 사용되는 의식·용악절도(用樂節度)·악현(樂懸)·악곡(樂曲)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악의 제례(祭禮)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아악은 원구(圜丘)·사직(社稷)·태묘·선농(先農)·선잠(先蠶)·문선왕묘에 쓰였으며, 조선 태종 때에 완성된 ≪국조오례의≫ 길례(吉禮)에서는 원구가 빠지고 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성황(山川城隍)과 우사(雩祀)가 추가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고려의 원구는 상제(上帝)와 오제(五帝)를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는 데 반하여 ≪국조오례의≫에서는 원구 대신 풍운뇌우·산천성황을 중사로 격을 낮추어 마련한 점이다.

이는 천자만이 하늘을 제사할 수 있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실제로 원구는 태조 1년에 폐지되었다가 태조 3년에 다시 원단(圓壇)으로 개칭, 복구된다.

그러나 ≪세조실록≫ 악보에는 아악과 속악을 겸용한 원구악이 실려 있다. 또한, ≪국조오례의≫ 종묘에는 아악이 쓰이나 아·종헌과 송신에는 향악이 교주된다. 세조 10년부터는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아악이 아닌 속악 <보태평 保太平>·<정대업 定大業>이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용악절도

모든 제향에 정해진 일련의 절차가 있으며, 각 절차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악(樂)·가(歌)·무(舞)가 있다. 음악을 쓰는 절도를 ≪고려사≫ 악지의 태묘 친사를 예로 들어 본 바와 같이 각 절차에 따라 그것에 상응하는 음악을 등가(登歌)·헌가(軒架)에 의하여, 상가하주(上歌下奏)의 음양에 맞추어 연주한다.

신을 맞고 보내는 영신과 송신을 제외하면, 모든 곡이 등가에서는 음려(陰呂)인 협종(夾鐘)을, 헌가에서는 양률(陽律)인 무역(無射)을 연주함을 알 수 있다. 의종 때로 추정되는 <등가헌가악질주절도 登歌軒架樂迭奏節度>는 아악을 순용(純用)한다는 점에서 <대성아악>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명종 때로 추정되는 ≪고려사≫ 예지(藝志)의 <등가헌가악질주절도>의 경우에는 다소 차이를 보이니, 첫째 송신에 추어지던 무무(武舞)가 아헌·종헌으로 자리를 옮기며 초헌에 문무(文舞)가 추가된다. 둘째, 아헌·종헌과 송신에 향악이 교주(交奏)된다.

이러한 전통은 ≪국조오례의≫를 거쳐 적어도 세종 6년까지, 즉 세종 9년에 박연(朴堧)의 상소에 의하여 향악연주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고려사≫ 악지의 음복이 ≪국조오례의≫에서는 아헌·종헌 뒤로 자리를 바꾼다.

이와 같이 약간의 변개는 있었으나 대체로 ≪주례 周禮≫ 등의 중국 고제(古制)를 충실히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악 현

아악의 등가·헌가는 8음(八音), 즉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의 악기들로 구성되며, 8음을 완전히 구비하는 것이 원칙으로 우리 나라에는 예종 11년에 다음과 같은 <대성아악>의 악기들이 들어왔다.

편종(編鐘)·편경(編磬)·1현금(一絃琴)·3현금·5현금·7현금·9현금·슬(瑟)·지(篪)·적(篴)·소(簫)·소생(巢笙)·화생(和笙)·우생(竽笙)·훈(壎)·박부(博拊)·진고(晋鼓)·입고(立鼓)·축(柷)·어(敔)의 20종이고, 수량으로 보면 등가악기 48점, 헌가악기 374점, 합계 422점이었다.

특히 편종·편경과 모든 관악기는 각각 정성(正聲)과 중성(中聲)을 한짝으로 하였다(이러한 점은 예종 11년에 지어진 太廟九室의 登歌樂章이 정성과 중성으로 한짝을 이룬 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의종 때로 추정되는 ≪고려사≫ 악지의 등가헌가진설조(登歌軒架陳設條)에는 정성·중성의 구별이 없어진 듯하다. 또한 명종 때에는 사음(絲音, 금슬)과 토음(土音, 塤) 두 가지가 결여되어 아헌·종헌과 송신에 향악의 첨가와 함께 아악의 결난(缺難)을 보여 준다.

≪국조오례의≫의 아악진설은 몇 가지 점에서 전조(前朝)의 그것과 다르다. 첫째, 가종(歌鐘, 特鐘)·가경(歌磬, 特磬)·관(管)·약·부(缶)가 추가되고, 둘째 헌가의 금·슬·가가 빠지며, 셋째 생 대신 적이, 소생·우생·화생 대신 생·우·화가, 등가의 박부 대신 절고가 사용된다.

그 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쳐 정조 무렵에는 ≪국조오례의≫와 비교하여 특종·특경과 포음(匏音)악기의 대부분이 빠지고 헌가악기의 수가 현격히 축소되는 점에서 현행 아악의 악현과 유사하다.

(4) 악 곡

고려의 <대성아악>과 세종 8년 박연의 상소문에 언급된 조선국악장(朝鮮國樂章)이 고려와 조선 초기를 통하여 제향악으로 쓰였으나 지금 그 악보가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세종 12년에 선대의 아악을 바로잡기 위하여 새로 편찬된 아악보가 ≪세종실록≫에 실려 있다.

이 아악보에는 새로 찬정된 조회악(朝會樂)·제향악과 함께 그 저본이 된 주희(朱熹)의 ≪의례경전통해 儀禮經傳通解≫의 시악(詩樂)과 임우(林宇)의 ≪대성악보 大成樂譜≫가 실려 있다.

≪의례경전통해≫ 시악은 황종청궁(黃鐘淸宮)인 소아(小雅) 6편 26과 무역청상(無射淸商)인 국풍(國風)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이 소아만을 채용하여 조회악으로 삼았다.

다음 ≪대성악보≫는 모두 16궁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실록≫ 아악보는 이 중 영신의 대려위각(大呂爲角)·태주위치(太簇爲徵)·응종위우(應鐘爲羽)와 관세의 고선궁(姑洗宮) 등 모두 4궁을 버리고 영신황종궁과 송신황종궁 외에 남려궁(南呂宮) 8, 고선궁 2, 모두 12궁을 취하여 제향악으로 삼았다.

≪악학궤범≫ 성종시대 아악부제악(雅樂部祭樂)에서 이 중에서 영신황종궁과 송신황종궁의 2궁을 취한 뒤, 영신궁을 이조(移調)하여 12곡을 얻고 송신궁을 이조하여 3곡을 얻어 모두 15곡을 싣고 있다.

이 15곡을 천지인(天地人)의 용률에 따라 풍운뇌우·산천성황·사직·선농·선잠·우사·문선왕에 사용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석전에서 보존, 연주되고 있다.

아악은 5음과 2변음 모두 7음으로 곡의 강(綱)을 삼으니 궁·상·각·변치·치·우·변궁이 그것이다. 5음은 각각 기음(基音)이 되어 궁조(宮調)·상조(商調)·각조(角調)·치조(徵調)·우조(羽調)를 만드는데, 상조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악에는 또한 고정진동수를 가지는 12율이 있고, 12율은 음양의 2분적(二分的) 사고에 의하여 양률인 황종·태주·고선·유빈·이칙(夷則)·무역과 음려인 대려·협종·중려·임종·남려·응종으로 구분되며, 양률은 헌가악에, 음려는 등가악에 각각 기음으로 사용된다. 이런 점을 조정하기 위하여 <율려신서 律呂新書>에서는 황·임·태·남·고·응의 6변율을 마련하였다.

거문고·대금 등으로 연주되는 향악이 3옥타브의 넓은 음역을 사용하는 데 반하여 아악은 1옥타브, 즉 12율만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한 곡이 이조될 경우 12율의 음역을 벗어나는 음은 1옥타브를 올리거나 내려야 한다.

그러나 앞의 항에서 말한 5성의 관념성에 의하여 12율만을 사용한다는 원칙은 다소 수정된다. 무겁고 탁한 소리는 존귀하고 가볍고 맑은 소리는 비천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신(臣)을 나타내는 상음과 민(民)을 나타내는 각음(角音)은 군(君)을 나타내는 궁음의 밑으로 내려갈 수 없다. 응종을 기음으로 하는 궁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궁 상 각 변 치 우 변

치 궁

응 대 협 중 유 이 무

이와 같이 되어 12율을 넘어서는 청성은 모두 옥타브를 낮춰 전성(全聲)으로 연주해야 되나, 상인 대와 각인 협은 궁인 응의 밑으로 내려갈 수 없다. 결국 아악은 12율과 황·대·태·협의 4청성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악은 철저히 1자(字)·1음(音)·1박(拍)을 원칙으로 한다. 가사가 4자 1구, 전 8구로 되어 있는 것에 따라서 음악도 4음(4박)이 한 마루가 되어 모두 8마루로 이루어진다.

이 때 한 곡은 반드시 기음[궁 : 이때의 궁은 5성의 궁이 아니고, 악의 궁상일상이(宮上一上二)에서의 궁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으로 시작하고 기음으로 끝맺는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악학궤범(樂學軌範)』
「고려대성악(高麗大晟樂)의 변천」(이혜구, 『한국음악서설』,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7)
「한국과 중국의 현행문묘악비교」(이혜구, 『한국음악논총』, 수문당, 1976)
「고려의 음악」(이혜구,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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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권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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