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가 3,444㎞에 달한다. 면적은 33만 1210㎢, 인구는 9,458만 명(2018년 현재), 수도는 하노이(Hanoi)이다.
주민은 베트남인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중국인과 53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베트남어이며, 종교는 불교가 80%, 가톨릭교가 9% 등이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990억 달러, 1인당 국민생산은 2,200달러이다.
베트남은 1당 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500석)이며, 정당은 공산당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패주한 뒤에 인도차이나에 복귀한 프랑스는 호찌민〔胡志明〕이 세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월맹)에 대항하여 1946년 6월 안남국 황제 바오타이를 옹립하여 월남국(越南國)이라는 보호령을 세웠다.
이로 인해 제1차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으며 8년에 걸친 월맹의 프랑스에 대한 항쟁은 1954년 5월 8일 디엔비엔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함으로써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양분되었다. 남부에는 사이공을 수도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 월남), 즉 고딘디엠 정권이, 북쪽에는 호찌민 정권이 수립되었다.
월남은 프랑스를 대체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으로 유지되었으나, 1973년 1월 파리휴전협정조인으로 미국이 철수함에 따라 붕괴의 길을 걷게 된다. 1973년 1월 8일 키신저 미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과 레둑토 월맹 정치국원은 파리의 제4차 비밀협상에서 휴전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월 27일 파리에서 로저스 미 국무장관, 트란반남 월남 외상, 구엔투이트린 월맹외상, 구엔티빈 월남임시혁명정부 외상이 월남전쟁의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 및 4개 부속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20년에 걸친 월남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어 미국·월남·월맹·베트콩의 4자합동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3월 27일 포로교환 완료와 더불어 주월미군은 철수했다. 휴전은 성립되었으나 휴전 위반 사례가 빈번하여, 1973년 2월 업무를 시작한 중립 4개국(캐나다·헝가리·인도네시아·폴란드)의 휴전감시관리위원회(ICCS)는 감시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월남 정부군과 베트콩은 관할지역 확장을 위해 무력충돌을 계속하여 전투가 다시 일어났다. 결국 1975년 초 월맹과 베트콩은 대공세를 전개하여 각 성(省)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마침내 4월 30일 사이공(현 호찌민시)을 함락시켰다.
그 날 새벽 주월 미국대사관의 대규모 헬리콥터 철수작전이 종료되고 몇 시간 후 월남의 두옹 반 민 대통령은 무조건 항복했다. 1975년 이후 베트남·라오스·캄푸치아로부터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한 선상 난민들, 즉 보트 피플(boat people)이 급격하게 늘어나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979년에는 매달 7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에 이르렀으나, 인접국의 상륙거부, 강제송환, 조난과 표류, 기아와 해적의 피해 등으로 극심한 참상을 겪었다.
1979년 6월 유엔난민문제고등판무관(UNHER)은 베트남 정부와 해상탈출 난민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월남인들의 질서 있는 출국을 허용한다는 특별협정을 각서형식으로 체결했다.
이어 7월 20·21일 제네바에서는 유엔 주관하에 65개 관계국이 참가한 베트남난민 국제회의가 열려, 베트남은 난민추방책을 지양할 것을 약속했고, 미국 등 서방 각국은 난민 분할 정책 및 난민 구제비 갹출을 약속함으로써 선상 난민은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동남아 각국에 도착한 난민수는 35만 명을 헤아리며, 지역별로는 말레이시아 16만 5,000명, 태국 6만 5,000명, 필리핀 2만 6,600명, 싱가포르 6만 5,000명 등이다. 중국은 월남화교 2만 6,000명을 수용했다. 1980년까지 서방 각국이 받아들인 난민 수는 미국의 31만 명을 비롯하여 캐나다 7만 명, 프랑스 7만 명, 오스트레일리아 4만 3,000명 등이다.
1986년 12월 공산당 제6차 당대회에서 경제 개혁을 위한 도이모이(刷新) 정책이 채택된 후 1989년 환율 및 악성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농업 생산의 증대 등으로 베트남 경제는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나 1990년 동구권과 구소련의 몰락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기존의 동구권 무역 시장이 붕괴됨에 따라 소련과 동구권으로부터의 원조 중지 및 무역 관계붕괴, 인플레 및 실업의 급증 등 경제 성장률 하락과 재정 적자 증대로 베트남은 사회·경제적 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7년 9월 20일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라오스와 우호 협력조약을, 1978년 11월 소련과 우호 협력조약을, 1979년 2월 캄푸치아와 우호 협력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등 서방 국가와의 우호강화를 시도하였고, 한편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중국·러시아 등 국가들과도 기존 우호 관계 재확립을 시도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공산국가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1977년 유엔에, 1975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난민(難民)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고려 때인 1226년에 안남왕자 이용상(李龍祥)과 그 친족 군필(君苾)이 송나라로 망명하던 도중에 표류하다가 당시의 옹진현(甕津縣) 창린도(猖麟島)에 도착하였다.
이용상은 오늘날 옹진군 마산면(馬山面) 화산리(花山里)에 살았으며 그 뒤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을 항복시켰으며 그 공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져, 화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지방 30리와 인구 20호(戶)를 식읍으로 받았다. 옹진 본영(本營) 동문(東門) 근처에는 그의 공적을 기린 기적비(紀績碑)가 있으며, 두문동(杜門洞) 이을봉(离乙峰) 아래에는 그와 아들·손자에 이르는 3대의 무덤이 있다.
지금의 화산이씨(花山李氏)들은 그의 후손이다. 또 『광해군일기』 권15에는 1612년 베트남 상인들이 제주도에 표류해왔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그 경위와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의 월남 기착사실도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진주사람이 월남에 다녀온 일도 있고 1777년(숙종 43)에는 제주도 사람의 베트남표류 기사도 있다.
베트남이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우리나라는 1955년 10월 월남공화국을 승인하고, 그 다음해 5월 사이공에 외교공관을 설치한 이래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1964년 9월 22일 시작된 한국군 파월 이후 두 나라 관계는 긴밀하게 전개되었다.
파리휴전협정에 따라 1973년 3월 24일 한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경제적 협력관계가 모색되었다. 그러나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인 1975년 4월 29일 주월 한국대사관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일부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철수하지 못한 채 베트남 치하에 남아 있다가 1976년부터 1980년에 걸쳐서 송환되었다.
그 간의 관계에서 우리나라와 월남 간의 국가원수 상호방문은 모두 다섯 차례 있었다. 1957년 9월 28일 고딘 디엠 대통령의 방한이 있었고, 1958년 11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방월했다. 1966년 10월 21일에는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방한했다.
당시 우리나라와 월남 간에는 한월관세 협정(1959. 1. 1.), 한월무역 협정(1962. 12. 19.), 주월한국군원조단의 지위에 관한 협정(1964. 10. 31.), 한월항공운수 협정(1967. 1. 16. 발효, 1969. 9. 16. 개정), 한월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1971. 6. 12.)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기술자들의 월남 진출은 1965년 9월 미국 회사의 고용으로 42명이 사이공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절정기였던 1968년에는 1만 5,571명에 이르렀고, 1971년 7월 1일 현재 교민 수는 6,321명이었다.
비행한국인이나 유랑한국인 문제도 뒤따라 일어났으며 1966년부터 1972년 2월까지 대사관으로부터 강제송환·자진귀국·경고처분을 받은 사람도 1,152명이나 된다. 또 국제결혼 등에 의한 한월혼혈아의 수도 1,5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파리휴전협정조인으로 교민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1973년 6월 30일 현재 1,882명으로 집계되었다.
1975년 4월 말 사이공 함락을 앞두고 주월 한국대사관이 철수를 위한 일제등록을 실시해서 파악한 교민 수는 504세대 902명이었다. 그 중 우리나라 정부가 파견한 수송함에 탑승하여 4월 26일 사이공을 떠난 교민은 537명이다.
한편 우리나라 기업의 월남진출은 전쟁경기를 타고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66년에는 진출기업이 9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3년 뒤에는 55개 기업으로 늘었으며, 이듬해인 1970에는 56개 기업으로 절정에 달했다. 1971년 6월 말에는 43개 기업으로 줄고, 1972년에는 22개 기업으로 떨어졌다.
한국업체들의 건설계약고는 1968년 1,039만 달러, 1969년 1,154만 달러로 절정에 달했다가 1970년 1,064만 달러, 1972년과 1973년 각각 900만 달러로 떨어졌다. 우리나라의 대월남 외환수입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7년 동안 수출에서 7,630만 달러, 물품군납에서 1억 3,930만 달러로 합계 2억 1560만 달러이다.
무역외수입인 용역 및 건설군납·군인송금·기술자송금·특별보상지원에 의한 수입은 같은 기간 동안 총 6억 4,190만 달러를 기록한다. 군인송금은 1966∼1972년간 1억 7,830만 달러, 기술자송금은 같은 기간에 1억 6,620만 달러였다.
경상수입 및 무역외수입에 의한 대월남 외환실적은 1966년 5,800만 달러, 1967년 1억 3,350만 달러, 1968년 1억 5,620만 달러, 1969년 1억 5,840만 달러, 1970년 1억 5,180만 달러로 총계 85억 7,600만 달러에 이른다.
한편 우리나라는 한월경제기술협력 협정(1971년 6월 1일 발효)에 따라 의료원을 준공했다. 이후 의료원 건립과 운영에 관한 약정(1974년 1월 30일 체결)에 따라 우리나라는 매년 28만 5,000달러의 경비를 부담하여 의료원에 근무할 의사 및 요원들을 3년간 파견하기로 하고, 1974년 2월 최초로 의사 10명을 포함한 의료사절단을 파견했다.
또 우리나라는 1967년 농업기술단을 파견했는데, 1967년 이래 농업사절단으로 승격시키고 1973년에는 16명의 농업사절단을 파견하는 농업기술협정을 체결했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우리나라가 파견한 농업사절단의 총인원은 215명이다.
월남정권의 패망 후 우리나라는 1977년부터 1985년까지 807명의 선상난민을 수용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교류는 중단되었으나 구엔 반린 서기장이 도이모이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양국의 교역 규모는 확대되고 있다. 1992년 4월 4일 연락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였으며, 12월 22일에는 양국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후 양국 간에는 1993년 2월 경제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93년 5월에 무역 협정, 항공 협정, 투자보장 협정, 1994년 5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4년 11월에 문화 협정, 1995년 3월에 세관협력 협정, 1995년 4월에 해운 협정, 1996년 11월에 체육교류 협정, 1998년 12월에 사증면제 협정, 1996년 11월에 원자력 협정, 1998년 12월에 외교관 및 관용여권 사증면제 협정, 2000년 3월에 교육협력 협정, 2002년 8월에 관광 협정, 2003년 9월에 범죄인 인도조약. 형사사범공조조약, 2004년 10월에 에너지 및 자원협력MOU, 2005년 4월에 베트남 원전인력훈련MOU 등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베트남 수출액은 277억 9000달러로 주종목은 기계장비·석유제품·비료 등이며, 수입액은 90억 달러로 주종목은 원유·수산물·쌀·커피 등이다.
2007년 현재 베트남에는 삼성, 코오롱, 쌍용, SK 등 150여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3만 7,000여명의 한국민 교민과 5만여 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50년 1월 31일 수교를 하고, 같은 해 10월 25일 각각 공관을 개설하였다. 양측 간에는 1957년 11월과 1973년 3월에 문화협조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59년 5월에는 방송 협정, 1977년 1월에는 민영항공업무에 관한 협정, 1977년 3월에는 체신사업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1997년 5월에는 외무협조합의서, 2002년 5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투자보장 협정, 민형사사법공조조약, 해양수송에 관한 협정, 2003년 11월에는 표준화도량형품질감독 협정, 2004년 4월에는 품질관리분야협조계획 등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대북한 수출액은 1978년의 경우 85만 달러, 수입액도 85만 달러였으나 최근의 무역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1991∼1995년 경제 및 무역 분야 협력 약정서에 서명은 하였으나 연 교역량은 100만 달러 이하로 극히 저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