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佾)은 열(列)과 같은 뜻으로, 일무는 지위(地位)에 따라 팔일무(八佾舞)·육일무(六佾舞)·사일무(四佾舞)·이일무(二佾舞)의 네 종류가 있다.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누어지고, 회례연 또는 제례(祭禮) 때 추었는데, 제례의 예를 들면 문무는 영신(迎神)·전폐(奠幣)·초헌(初獻)의 예(禮)에 쓰고, 무무는 아헌(亞獻)과 종헌(終獻) 때 사용되었다.
일무의 구성인원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즉, 줄[列]수는 변해도 1줄에 8명씩으로 곱하는 설과, 줄수가 변하면 그 줄수에 따라 춤구성원도 함께 적어진다는 설이 있다.
① 팔일무: 천자(天子)일 경우에 추며, 1줄에 8명씩 8줄로 64명이 춘다.
② 육일무: 제후(諸侯, 王)의 경우에 추며, 1줄에 6명씩 6줄로 36명의 설과, 1줄에 8명씩 6줄로 48명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③ 사일무: 대부(大夫)의 경우에 추며, 1줄에 4명씩 4줄로 16명의 설과, 1줄에 8명씩 4줄로 32명의 두 가지 설이 있다.
④ 이일무: 사(士)의 경우에 추며, 1줄에 2명씩 2줄로 4명의 설과, 1줄에 8명씩 2줄로 16명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116년(예종 11) 고려에 들어온 대성아악에서는 36명의 육일무가 들어왔고, 『고려사』 악지(樂志)에 전하는 친사등가헌가조(親祠登歌軒架條)에는 1줄에 8명씩 6줄에 48명의 육일무를 썼고, 유사섭사등가헌가조(有司攝事登歌軒架條)에는 1줄에 8명씩 4줄로 32명의 사일무를 썼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 일무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① 육일무: 조선 초기 이후로 회례·영녕전(永寧殿) 및 종묘·문묘의 제향 때 추며, 그 무원구성은 달랐다. 즉, 회례연에 쓰는 일무는 1줄에 8명씩 6줄에 48명의 육일무를 쓰고, 종묘제례악의 일무는 1줄에 6명씩 6줄에 36명의 일무를 채택하였다. 문묘제례악의 일무는 조선 전기에 48명의 육일무, 조선 후기에 36명의 육일무를 시행하였다.
종묘·문묘와 영녕전의 육일무는 대한제국기인 1897년에 64명의 팔일무로 바꾸었으나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다시 육일무로 격하되었다.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는 종묘·문묘 및 영녕전의 제향을 부활시킨 뒤 다시 팔일무를 채택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제향 때의 일무는 정중(正中)에 서게 하여 등가(登歌)의 노래의 위치와 같아야 예에 맞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종묘의 뜰이 좁고 전하(殿下)의 판위(板位) 및 관세위(盥洗位), 여러 집사(執事)의 배위(拜位)·서립지위(序立之位) 등이 모두 동쪽 뜰에 있어 부득이 일무를 서쪽 뜰에 배설하였으나, 정조 때에는 종묘의 실수(室數)가 14실이나 되고, 또 동서의 뜰도 넓으므로, 삼일(三佾)은 정로(正路: 神道)의 동쪽에, 삼일은 서쪽에 서도록 하였다. 현재는 정로의 서쪽에 서서 일무를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