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원 ()

장악원악원이력서
장악원악원이력서
국악
제도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
이칭
이칭
장악서
정의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
개설

이원(梨園)·연방원(聯芳院)·함방원(含芳院)·뇌양원(蕾陽院)·진향원(趁香院)·교방사(敎坊司)·아악대(雅樂隊) 등으로 불렸다. 장악원은 조선 초기 장악서와 악학도감의 전통을 전승한 1470년(성종 1) 이후 1897년 교방사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공식적으로 사용된 국립음악기관의 명칭이었다.

이 기관은 본래 예조에 소속되었던 한 독립기관으로서 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 등과 같은 정3품아문의 관청이었는데, 1895년(고종 32) 실시된 정부기구개편에 의해 예조로부터 궁내부(宮內府)의 장례원(掌禮院)으로 이속되었다.

궁중의 여러 의식 행사에 따르는 음악과 무용은 장악원 소속의 악공(樂工)·악생(樂生)·관현맹(管絃盲)·여악(女樂)·무동(舞童)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악공은 장악원의 우방(右坊)에 소속되어 연향(宴享: 국빈을 대접하는 잔치) 때 쓰인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주로 연주했고, 악생은 좌방(左坊) 소속으로 제례의식 때 사용된 아악(雅樂)의 연주를 맡았다. 내연(內宴)의 행사 때에는 악공과 관현맹이 음악을 연주했고, 무동(舞童: 나라 잔치 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과 여기(女妓)가 정재(呈才)를 추었다.

장악원의 모든 음악행정은 문관출신의 관원이 관장했으며, 악공과 악생 등의 음악교육 및 춤 연주에 관한 일은 전악(典樂) 이하 체아직(遞兒職: 이름만 있고 실제 직무는 없는 벼슬자리)의 녹관(祿官)들이 수행했다. 이러한 장악원 전통의 일부가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어오고 있다.

역사적 변천

장악원은 직접적으로 장악서에서 유래되었고, 간접적으로는 조선 초기의 아악서(雅樂署)·전악서(典樂署)·관습도감(慣習都監)·악학(樂學) 등과 관련되어 있다.

1457년(세조 3) 이전까지 65년 동안 궁중음악과 무용 교육 및 연주활동은 주로 전악서·아악서·관습도감·악학 등 상설 음악기관에 의해 관장되어오다가, 1457년 11월 세조의 특명으로 아악서와 전악서는 장악서로 통합되고 악학과 관습도감은 악학도감으로 합쳐졌다.

이듬해 7월 장악서와 악학도감의 직제가 한 번 개편된 이후 1466년 장악서는 악학도감의 일부를 흡수했기 때문에, 모든 궁중의 음악과 무용의 행정 및 연주활동은 장악서라는 하나의 음악기관으로 단일화되었다. 그 뒤 1470년 이전에 이미 장악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정확한 연대는 문헌에 밝혀지지 않았다.

장악원의 명칭은 그 뒤 연산군 말경 한때 연방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중종 때 다시 장악원으로 되었으며, 영조 때 잠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이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악원의 전통은 1470년 이후 계속되어 내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여러 번 명칭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 궁내부의 장례원으로 옮겼고, 1897년 명칭이 교방사로 바뀌었다. 그 뒤 1907년 장악과(掌樂課)로 되었고, 경술국치 직후에 장악과 소속의 음악인들은 아악대라는 명칭 아래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아악대는 그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개칭되어 8·15 해방 이전까지 쓰였다.

해방과 함께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개칭되어 장악원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50년 1월 18일 대통령령 제271호로 국립국악원의 직제가 공포되고, 1951년 4월 9일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설립됨으로써 이왕직아악부의 전통이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장악원의 관사는 성종의 특명으로 태상시(太常寺) 동쪽 수십 보 떨어진 곳에 민가를 철거하고 세워졌는데, 위치는 한성부 서부 소속의 여경방에 있었다.

새 청사에 장악원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郎廳)들이 일할 곳과 악공 및 악생들이 연습할 장소가 구별되어 마련되었고,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보관할 건물과 정조(正朝)나 동지(冬至) 때 문무백관들이 음악에 맞추어 조하의식(朝賀儀式)을 연습할 수 있는 넓은 뜰도 갖추었다.

임진왜란 때 이 청사가 불타버렸기 때문에, 선조 말기에 새로운 청사가 명동의 구 내무부청사 자리에 건립되었다. 새 청사의 대지는 1만 평이었고, 그 위에 수백 칸의 건물이 세워졌으므로 장악원의 음악활동이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300여 년 동안 사용된 이 건물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대의 전진기지로 징발되어, 그 뒤 장악원의 후예들은 정국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뚜렷한 청사도 없이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04년 당시의 교방사는 조동에 있는 개인집으로 옮겼다가 서울역 뒤 서학현(西學峴: 지금의 중림동)에 있는 장혜원 자리로 청사를 옮겼다.

경술국치 직후 당시 아악대는 1911년 장혜원의 자리에서 당주동에 있었던 봉상시(奉常寺)의 주고(酒庫)를 수리해 임시로 옮겼다. 그곳에서 아악대는 이왕직아악부로 개칭되었고,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의 제1·2기생들을 모집해 양성했다. 그 뒤 이왕직아악부는 1926년 1월 창덕궁 앞 운니동의 구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 왕실에서 돈을 주어 세웠던 공장)의 불탄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겼다.

이왕직아악부 이후 구왕궁아악부와 국립국악원은 모두 운니동의 건물에서 장악원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1967년 12월 29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에 있었던 구 국립국악고등학교의 건물로 잠시 옮겨졌다. 다시 국립극장으로 옮겼고, 최근에는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국악당의 새 건물로 옮긴 이후 오늘까지 장악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직제

장악원은 장악서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전승했기 때문에 그 직제도 장악서의 것을 물려받았으나, 장악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새롭게 정비되면서 직제는 실제로 많이 변천되었다.

장악서의 직제는 본래 음악의 교육 및 연주를 담당했던 체아직의 녹관들로만 구성되었으나 1466년 1월 장악서가 악학도감의 업무를 흡수했으므로, 악학도감의 일반 유품출신(流品出身)의 관리들이 맡았던 음악행정에 관한 일을 관장하도록 확대되었다.

따라서 1466년 이후 1470년 이전까지의 장악서의 직제는 악공과 악생출신인 체아직 녹관 35인과 일반 문관출신인 정식관리 7인으로 구성되었다.

체아직 녹관은 1458년 7월에 개편해 설치된 좌방 소속인 종5품의 가성랑령(嘉成郎令) 1인, 종6품의 순화랑부령(純和郎副令) 1인, 종7품의 사음랑낭(司音郎朗) 2인, 종8품의 화성랑승(和聲郎丞) 2인, 종9품의 화절랑부승(和節郎副丞) 12인 등 18인 및 우방 소속인 종5품의 사성랑전악(司成郎典樂) 2인, 종6품의 조성랑부전악(調成郎副典樂) 1인, 종7품의 사협랑전율(司協郎典律) 2인, 종8품의 조협랑부전율(調協郎副典律) 4인, 종9품의 조절랑직률(調節郎直律) 8인 등 17인을 합해 총 35인이었다.

한편 장악서 소속의 일반 유품출신의 관리는 당상관으로 실안제조(實案提調) 2인과 부제조 2인, 낭관(郎官)으로 사(使) 1인, 부사(副使) 1인, 판관(判官) 3인 등 총 9인이었다.

성종 이전 장악서의 직제는 관리의 출신성분과 직책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졌으며, 체아직 녹관의 품계는 문관 출신의 일반 유품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이러한 장악서의 직제는 성종 때 장악원으로 명칭이 바뀜과 동시에 다시 정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관리의 명칭과 인원이 모두 새로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장악서에서처럼 음악행정을 맡았던 문관출신의 관리와 음악교육 및 연주를 관장했던 체아직 녹관의 제도는 그대로 전승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악원의 음악행정을 맡았던 관리들의 직제는 당상관인 제조(提調) 2인 및 낭관인 정3품의 정(正) 1인, 종4품의 첨정(僉正) 1인, 종6품의 주부(主簿) 1인, 종7품의 직장(直長) 1인 등 6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직제는 성종 이후 변동되지 않고 계속되어 내려오다가 영조 때 약간 변동되었다. 영조 때 변동된 사항은 종7품의 직장 1인을 없애는 대신 종6품의 주부 1인을 2인으로 만든 점이다.

성종 때 새로 정비된 장악원 체아직 녹관의 직제는 1458년 때의 것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장악서 소속 좌방의 악생 관직명은 모두 없어졌고, 그 대신 전악·부전악·전율·부전율 같은 우방의 악공 관직명에 새로운 관직명이 첨가되었는데 전음(典音)·부전음·전성(典聲)·부전성이 새로 첨가된 관직명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음악의 연주 및 교육을 담당했던 체아직 녹관의 직제는 이전(吏典)의 잡직(雜職)란에 정리되었는데, 정6품의 전악 1인, 종6품의 부전악 2인, 정7품의 전율 2인, 종7품의 부전율 2인, 정8품의 전음 2인, 종8품의 부전음 4인, 정9품의 전성 10인, 종9품의 부전성 23인, 이상 총 46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체아직 녹관 46인 중 악공의 체아는 모두 20인으로 당악의 체아 12인과 향악의 체아 8인이었으며, 나머지 26인은 악생의 체아와 관현맹(管絃盲)의 체아로 구성되었다. 장악서의 종5품 전악이 장악원의 정6품으로 강등되었고, 인원도 1명이나 줄었으며, 그 대신 하급직의 관원이 많이 증원된 것이 새로 정비될 때 달라진 점이다.

장악원의 잡직 녹관 46인은 모두 나라에서 녹봉을 주기 위해 만든 체아직 관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장악원으로부터 1년에 4번 보낸 추천서로 이조에 보고해 사령서(辭令書)를 받았다.

성종 당시 장악원에는 체아직 녹관 46인과 행정직 관리 6인, 이상 총 52인의 관리들 이외에 잡무를 맡았던 차비노(差備奴) 7인, 유품관리를 쫓아다니던 근수노(根隨奴) 5인, 이상 12인의 사내종이 있었다.

음악인

장악원의 음악활동은 주로 악공과 악생에 의해 연주되었으며, 내연(內宴)의 경우에 때때로 관현맹·여기(女妓)·무동들에 의해 연주되기도 했다.

성종 이후 악공들은 천인 출신(賤人出身)으로서 연향(宴享) 때 향악과 당악을 연주했고 장악원의 우방에 속해 있었으며, 양인출신(良人出身)인 악생들은 제례의식 때 아악 연주를 담당했고 장악원의 좌방에 속해 있었다.

악공과 악생의 뚜렷한 구분은 1457년 아악서와 전악서가 장악서로 통합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에는 음악인들은 악공 또는 공인(工人)으로 불렸다.

조선 초기부터 1457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 관습도감과 봉상시 등에 속한 재랑(齋郎)과 무공(武工)이 아악연주를 담당했는데, 장악서의 설립 이후 그들의 업무가 악생에 의해 전승되었다.

1457년 이전 관습도감의 악공은 344인이었고 전악서의 악공은 300인, 아악서의 악공은 530인이었으며, 관습도감과 봉상시에 소속되었던 재랑은 380인이었고 무공은 290인이었다.

그러나 1457년 장악서의 설립으로 인해 재랑과 무공은 460인으로 감원되어 좌방에 속하게 되었고, 아악서의 악공은 300인으로 감원되어 좌방에, 전악서의 악공은 200인으로 줄어 우방에 각각 남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 당시 장악원의 좌방에 악생이 399인으로, 그리고 우방에 악공이 572인으로 각각 정비되어 총 971인의 음악인이 임진왜란 이전까지 연주활동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이후 악공과 악생의 수는 837인이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824인, 정묘호란(1627년) 이후 626인, 병자호란(1636년) 이후 619인으로 줄었다가 영조 때 641인으로 고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장악원 소속 음악인의 수가 눈에 띄게 변한 점은, 첫째로 악공·악생의 총계가 300여 인이나 현저하게 감원되었다는 것, 둘째로 악공의 숫자보다도 특히 악생의 숫자가 200여 인이나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여러 번의 국란을 겪은 이후의 장악원은 국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조선 전기처럼 많은 음악인들을 거느릴 수 없게 되었고, 연주활동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장악원 소속의 악공이나 악생이 결원되었을 경우 그 결원은 전국 팔도에 고르게 배정된 숫자에 의해 충원되었다. 악공은 공사비(公私婢) 또는 무녀(巫女) 같은 천인의 자녀 중에서 선발되었고, 악생은 정리(丁吏) 또는 보충군(補充軍) 등의 양인 자식들 중에서 뽑았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어 각 지방에서 선발되어 올라온 악공과 악생들은 취재시험(取材試驗)을 치르고 합격된 이후에야 정식으로 연주활동을 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 권3의 취재조에 의하면 조선 초기의 악생을 위한 취재시험은 아악 중에서 삼성(三成) 및 등가(登歌) 또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연주였으며, 악공을 위한 취재시험은 당악(唐樂)의 경우에 삼진작(三眞勺)·여민락령(與民樂令)·여민락만(與民樂慢)·낙양춘(洛陽春) 등 41곡이었고, 향악(鄕樂)의 경우에 이상곡(履霜曲)·오관산(五冠山)·자하동(紫霞洞)·동동(動動) 등을 포함한 32곡이었다.

그리고 악공과 악생들에게 필요할 때에 편종(編鍾)·편경(編磬)·생(笙)·화(和)·훈(壎)·지(篪)·금(琴)·슬(瑟)·용관(龍管)·가무(歌舞)를 시험을 치르게 했다.

취재시험을 치르고 합격된 악공과 악생들이 장악원에서 연주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서울의 민가(民家)에 의탁하거나 한성부(漢城部)의 한 곳에 모여서 생활했다.

이 때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악공과 악생의 생활비는 각 지방에 남아 있는 봉족(奉足)들이 그들의 신역(身役) 대신에 나라에 바치는 가포(價布) 또는 보포(保布)라는 베로 조달되었으며, 나라에서 악공과 악생들에게 따로 녹봉을 지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악공이나 악생에게 법적으로 배정된 두 사람의 봉족이 상납하는 가포 또는 보포를 서울 생활비의 근거로 삼고 악공과 악생들은 서울에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야만 했다.

정묘호란 이후 악공 또는 악생의 봉족 한 사람이 1년에 상납해야 하는 가포의 수량은 각 지방의 어려운 형편에 따라서 여러 번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악공과 악생들은 모자라는 요포(料布)로 민가의 기숙비(寄宿費)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한성부의 동부·중부·서부·남부·북부에 있는 빈 터에 움막을 치고 지내야만 했으며, 때때로 모자라는 요포 대신에 진휼청(賑恤廳)에서 곡식을 타다가 연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장악원의 음악인들은 거의 반세기 가량 비참한 서울 생활을 보냈지만, 차츰 나라가 안정됨에 따라서 그들의 생활형편도 조금씩 개선되었고 음악활동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므로 장악원의 전통이 오늘까지 일부만이라도 제대로 전승될 수 있었다.

활동 범위

장악원은 육조 중 예조에 속해 있었으므로 예조에서 맡아 거행하는 모든 궁중의식에 따르는 음악과 무용을 제공했다.

『경국대전』에 예조가 예악(禮樂)·제사·연 회·조빙(朝聘)·학교·과거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예조의 소임 중에 장악원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궁중의식들은 제례·연향·조의(朝儀)·대사객(待使客) 등이었다.

이러한 궁중의식에서 장악원이 음악과 무용을 어떻게 제공해야 한다는 의례규범이 『경국대전』 및 『악학궤범』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정비된 제례의식은 제사의 규모나 중요성에 따라서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 등 세 가지로 나누어졌다.

대사에 드는 제사는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이었고, 풍운뇌우(風雲雷雨)·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문선왕(文宣王)의 제사는 중사에 속했다.

종묘는 4맹삭(孟朔), 즉 1·4·7·10월의 상순에, 영녕전은 춘추 맹삭, 즉 1·7월 상순에, 사직은 춘추 중월(仲月), 즉 2·8월의 상술일(上戌日)과 납향일(臘享日)에 각각 제사를 지냈다.

풍운뇌우는 춘추 중월의 상순에, 선농은 경칩(驚蟄) 후의 해일(亥日)에, 선잠은 계춘(季春)의 사일(巳日)에, 우사는 맹하(孟夏)의 상순에, 그리고 문선왕은 춘추 중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각각 제례음악과 함께 거행되었다.

장악원은 종묘·영녕전·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소경전(昭敬殿)의 제례의식 때에는 속부제악(俗部祭樂)을 연주했으며, 풍운뇌우·사직에 모신 천신(天神)이나 우사·선농·선잠·문선왕 등 인신(人神)을 위한 제례의식에서는 아부제악(雅部祭樂)을 연주했다.

성종 당시에 거행된 종묘와 영녕전의 제례의식에서 악사 1인과 악공 36인이 등가(登歌)에서, 악사 1인과 악공 72인이 헌가(軒架)에서 의식절차에 따라 각각 제례악(祭禮樂)을 연주했다.

장악원은 종묘와 영녕전의 제례의식 때 음악연주뿐 아니라 의식에 필요한 일무(佾舞: 사람을 가로, 세로가 같게 여러 줄로 벌여 세워 추게 하는 춤)를 제공했으므로, 『악학궤범』에 의하면 악공 38인(둑을 든 2인 포함)은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를 추었고, 악공 71인(의물 및 악기를 든 35인 포함)은 정대업지무를 제례악에 맞추어 추었다. 장악원의 연주활동은 종묘 이외에 문묘·사직 등의 제례의식에서도 연주되었다.

이렇듯 조선 초기에 정립된 제례의식에 따르는 제례악의 전통은 정묘호란 이후 10년 동안 정지되었으나 곧 복구되어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고, 오늘날에도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은 소규모나마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어 연주되고 있다.

장악원은 여러 가지 제례의식 이외에 조의 및 연향에서도 연주활동을 관장했다. 정조(正朝)·동지(冬至)·성절(聖節)·천추절(千秋節) 때 궁중에서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조회하는 의식에서, 정조와 동지의 삭망(朔望: 음력 1일과 15일)과 대전(大殿)과 대비(大妃)의 생일 때 왕세자와 백관이 드리는 조하(朝賀)에서, 매달 5·11·21·25일 백관이 조참(朝參)할 때, 문무과전시 또는 생원과 진사의 급제를 발표하는 방방(放榜)에 임금이 거둥할 때, 장악원은 악사 2인과 악공 50인을 거느리고 전정고취(殿庭鼓吹)를 연주했다.

장악원의 음악인들은 조의 이외에도 임금이 가마를 타고 행차할 때 전부고취(前部鼓吹)와 후부고취(後部鼓吹)를 연주했는데, 각각 악사 1인과 악공 50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궁중잔치인 연향 또는 진연(進宴)이 거행될 때에도 음악을 제공했는데, 음악연주의 규모와 시기는 주최기관에 따라서 달랐다.

즉, 단오나 추석에 임금이 행행(行幸)할 때와 강무(講武)한 뒤에 의정부와 육조는 진연을 베풀었고, 매년 4중삭(仲朔) 때 충훈부(忠勳府)에서 진연을 벌였으며, 매년 두 번씩 종친부(宗親府)와 의빈부(儀賓府)에서 진연했고 충익부(忠翊府)에서는 매년 한 번씩 진연을 베풀었는데, 이러한 잔치 때마다 장악원은 악사와 악공을 보내 음악을 연주했다.

특히 정조와 동지 때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조의를 지내고서 잔치를 베푸는 회례연(會禮宴) 때 악공과 악생을 데리고 음악과 무용을 연주했는데, 세종 때 회례연의 등가에 악공 62인이 참가했고, 헌가에 139인의 악공이 의식절차에 따라서 연주했으며, 악생 100인이 50인씩 나누어져 문무와 무무를 각각 음악에 맞추어 추었다.

대비전(大妃殿)을 위한 진풍정(進豊呈: 진연보다 의식이 엄숙한 궁중의 잔치) 및 중궁의 예연(禮宴)이 거행될 경우에 장악원은 여기(女妓)와 관현맹(管絃盲)의 숫자를 임시로 정했는데, 정전(正殿)의 예연에 참여한 장악원의 악사는 1인, 여기는 100인, 악공은 60인이었다.

후원(後苑)에서 종친이 진연을 베풀 때, 또는 사정전(思政殿)에서 일본 사신이나 야인(野人) 사신을 접견할 때 장악원은 악사 2인, 여기 40인, 악공 20인을 보내어 음악과 무용을 연주하도록 했으며, 선정전(宣政殿)에서 일본 또는 야인의 사신을 접견할 때에는 악사 2인, 여기 20인, 악공 14인이 참가해 음악을 연주했다.

이 외에도 개성부(開城府)에서 중국사신을 위한 잔치 때, 모화관(慕華館)에서의 관사(觀射) 때, 그리고 기타 궁중의 연향 때마다 악사·악공·여기·관현맹 등을 보내어 음악과 무용을 연주했다.

이러한 장악원의 전통은 조선 초기 이후 계속되어 내려오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잠시 중단되었으나, 얼마 뒤 나라의 안정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다시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다.

영조 이후부터 고종 말기까지 궁중의 진연·진찬(進饌: 진연보다 간단한 궁중의 잔치)·진작(進爵: 진연 때 임금에게 술을 올리는 일) 때마다 음악과 무용을 제공했던 장악원의 활동사항은 진연의궤(進宴儀軌)·진찬의궤·진작의궤 등 여러 종류의 문헌에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악학궤범(樂學軌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악장등록연구(樂掌謄錄硏究)』(송방송,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국역(國役)대전회통(大典會通)』(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0)
「장악원(掌樂院)의 역사적연구」(송방송,『민족문화논총』8,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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