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호가(胡笳)라고도 한다. 악기 분류법에 의하면 이 악기는 목부(木部) 또는 공명악기(空鳴樂器, aerophone)에 속한다. 조선 후기에 주로 쓰였으며, 가는 세 개의 지공(指孔)과 한 개의 취공(吹孔)을 가졌던 관악기였는데, 그 몸통은 산유자(山楢子)나무로 제조되었다. 몸통의 길이는 3척 5촌이었으며, 둘레는 4촌 가량이었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이 악기는 본래 서역에서 중국 북쪽지방을 거쳐 한나라 때 전래되었기 때문에 흔히 ‘호가’라고 불렸다. 한나라 당시에 고취(鼓吹:북을 치고 피리를 붐)의 악기 편성에서 소(簫)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오(吳)나라 때의 고취에서도 소와 함께 연주되었고, 그 뒤 수나라 당시에는 후부고취(後部鼓吹)에서 소와 함께 쓰였다.
중국에서 쓰인 가는 피리와 비슷하게 생겼고 무공(無孔)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 관악기의 일종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서역계의 가라는 관악기가 언제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는지는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다만, 1828년(순조 28)에 편찬된 《진작의궤 進爵儀軌》 및 그 이후의 《진찬의궤 進饌儀軌》에 비로소 처음으로 가를 연주한 악공과 악기의 그림이 소개되었다.
《진작의궤》 권1 35장 악기풍물에 기록된 설명에 의하면, 가 한 쌍이 방향, 해금, 당금, 생, 당적 등 여러 악기와 함께 장악원(掌樂院)에서 새로 제조되었음이 분명하며, 새로 제조된 가는 한나라 또는 수나라에서 사용되던 악기와 역사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궁중 잔치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새로 만든 가는 권수(卷首) 29장의 도식(圖式)에 악기의 상단부에 뚫려 있는 한 개의 취구와 몸통의 중간 아랫부분에 뚫린 세 개의 지공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몸통의 길이가 3척 5촌이고, 몸통의 둘레가 4촌 가량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취구와 그 반대쪽은 몸통 부분보다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이 외관상 특징이고, 다른 관악기처럼 대나무로 제조되지 않고 산유자나무로 제조된 점도 특징이다.
1828년에 처음으로 제조되어 70여 년 동안 궁중의 잔치 때마다 연주되던 가는 그 이후의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늘날 악기의 실물도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