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악 ()

보허자 / 당악
보허자 / 당악
국악
개념
중국 전래의 속악과 그 체제에 의하여 창작된 악곡을 포괄한 궁정음악의 한 갈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당악은 중국 전래의 속악과 그 체제에 의하여 창작된 악곡을 포괄한 궁정음악의 한 갈래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속악으로 한정되었지만, 고려시대 이후로는 중국 속악을 지칭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당악을 바탕으로 송조의 속악을 수용하면서 전개되었다. 광종대를 시작으로 문종대에 활발해졌으며, 예종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전래 당악 외에 새로운 당악을 창제하였으나, 양란 이후로 쇠퇴일로로 치달아 현재 「보허자」와 「낙양춘」을 비롯한 일부 창작곡들만 연주되고 있다.

정의
중국 전래의 속악과 그 체제에 의하여 창작된 악곡을 포괄한 궁정음악의 한 갈래.
개설

당악(唐樂)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연주되어 왔던 궁정음악의 한 갈래로서 아악(雅樂), 향악(鄕樂)과 함께 삼부악(三部樂)이라 한다. 삼부악 가운데 아악과 당악은 중국 전래의 악종(樂種)인데, 중국의 아악과 속악을 우리나라에서는 각각 아악과 당악이라 칭하여 왔다.

당악은 본래 618년부터 907년간 존속했던 당나라의 속악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중국 속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당나라와 수평 시기에 존재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당악은 당나라의 속악이 되겠지만, 고려시대 이후로는 신라에서 전승된 당악을 바탕으로 송 · 원 · 명나라의 속악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당악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기 이전부터 이미 당문화(唐文化)를 선진문화로 여겨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4조에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다.”는 내용은 통일신라시대 문물 예악 제도의 실상을 말해준다.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에 김춘추(金春秋)를 당으로 파견하여 중국 제도를 따라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기를 요청한 뒤, 이듬해부터 백관의 공복 제도를 바꾸어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650년(진덕여왕 4)부터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 연호의 사용은 당나라의 정삭(正朔)을 따르는 것으로서 바로 중국의 예속을 의미한다.

664년(문무왕 4)에는 교서로 부인들도 당나라의 의상을 입게 하였으며, 같은 해에 성천(星川)구일(丘日) 등 28명을 현재의 공주 지역인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보내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 이는 한국음악사에서 당악의 유입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때 ‘당악’이라는 용어도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웅진부성에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성천이 662년(문무왕 2) 당시 귀당제감(貴幢弟監)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 때 배운 당악은 군악 고취(鼓吹)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9년 뒤인 673년(문무왕 13)에 김유신(金庾信)의 장례(葬禮)를 위하여 군악 고취 100명을 보내주었는데, 그 때 연주한 고취가 바로 웅진부성에서 당군(唐軍)으로부터 배운 당악이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당악이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내용과 통일신라시대의 여러 고고유물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악에 쓰인 악기 가운데 당 속악[연악]에 사용된 악기가 포함되어 있고, 비파와 삼죽의 음악에는 다수의 당 속악조가 포함되어 있다. 삼죽과 삼현의 해설에 삼죽은 당적(唐笛)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라 하였고, 현금과 가야금은 각각 당나라 악대(樂隊)인 악부(樂部)의 금과 쟁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였다.

악부는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 이래로 태상(太常)에 예속되어 있던 악대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악부(樂府)와 구별된다. 그밖에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왕립 음악 기관인 음성서(音聲署)라는 이름도 당나라의 전성기에 음악인들을 총괄하여 ‘음성인(音聲人)’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은 당시에 당악이 크게 유행하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비암사(碑岩寺)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층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層石像)[673년]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여러 고고유물에는 곡경비파 · 직경비파 · 공후 · 쟁 · 피리 · 배소 · 퉁소 · 횡적 · 생황 · 요고 혹은 장고 · 박판[박] · 동발 등 삼국시대의 고고유물에 보이지 않던 당 속악기의 모습이 보인다. 그 중 동발을 제외한 모든 악기가 주1의 속악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고유물에 묘사된 악기들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상당수의 당 속악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최치원(崔致遠)이 쓴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雙溪寺眞鑑禪師塔碑)’에 의하면, 진감선사 혜소(彗昭: 774~850)는 804년(애장왕 5)에 당나라로 건너가 승려가 된 뒤 26년 만인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지리산 옥천사(玉泉寺)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다.

비문 중 중국 청상(淸商) 3조의 하나인 ‘측조(側調)’의 명칭이 보이고, “길이 먼 곳에서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永於遠地流傳]”는 내용으로 미루어 진감선사가 전수한 범패, 즉 어산(魚山)은 당나라에서 배워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어산을 배우는 사람들이 당(堂)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고, 진감선사가 입적한 지 37년이 지난 뒤에도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을 정도로 당악의 일종으로서의 범패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데 진감선사와 유사 시기에 생존했던 일본의 자각대사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824년 중국 산동성(山東省) 문등현(文登縣)에 세운 적산원(赤山院)[이칭 적산신라원 혹은 적산법화원]에서 행한 의식의 내용과 절차가 수록되어있다.

당시 적산원에서는 적산원강경의식(赤山院講經儀式) · 신라일일강의식(新羅一日講儀式) · 신라송경의식(新羅誦經儀式) 등의 의식에 당풍(唐風), 신라음곡으로 된 범패, 일본 범패와 같은 것 등 3종류의 범패가 불리어진 것으로 전한다. 그 3종을 현재 당풍 · 신라풍(新羅風) · 일본풍(日本風) 혹은 고풍(古風)으로 부르고 있다. 진감선사가 옥천사에서 가르친 범패는 바로 당풍에 해당한다.

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의 당악이 당의 속악으로 한정되었다면 고려시대부터는 송의 속악이 대거 유입되면서 당악의 개념은 중국의 속악이라는 넓은 의미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의 당악은 통일신라에서 전승된 당악을 바탕으로 송조의 속악을 수용하면서 전개되었다.

고려조에서 송조의 속악을 처음 들여온 시기는 제4대 광종(光宗) 때이다. 당시 광종은 송조에 속악기와 악공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건너온 송조 악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다. 광종 때 송나라에서 보내온 악공은 충렬왕(忠烈王) 때의 김여영(金呂英)에 이르렀고, 또 충숙왕(忠肅王) 때에는 김여영의 손자 김득우(金得雨)로 이어졌다.

북송 전기에는 당대(唐代)의 옛 제도를 승습하여 교방(敎坊)이 독립된 기구로서 속악을 전담하였다. 당대의 교방은 본래 태상시(太常寺)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현종(顯宗) 때에 독립된 기구로 정식 출범하였고, 교방의 일상 업무는 환관 출신의 교방사(敎坊司)가 담당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광종 때 중국 전래의 속악 담당 기구로서의 교방을 설치한 뒤 송조에서 보내준 악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당송 시기의 교방사에 준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원 간섭기로 접어들기 전, 교방 악인들의 음악활동은 의종(毅宗) 때 상정된 위장행렬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교묘친사법가위장(郊廟親祀法駕衛仗)의 경우, 교방악관(敎坊樂官)과 인가(引駕)가 100명, 안국기(安國伎) 40명, 잡기(雜技) 40명, 고창기(高昌伎) 16명, 천축기(天竺伎) 18명, 연악기(宴樂伎) 40명, 취각군(吹角軍) 20명, 취라군(吹螺軍) 20명이 참여하였다.

봉은사진전친행(奉恩寺眞殿親幸) 상원연등(上元燃燈) 위장이나 서남경순행회가봉영위장(西南京巡幸回駕奉迎衛仗)의 후전대에도 상당수의 인가 · 교방악관, 안국기, 잡기 인원이 참예하였다. 이러한 위장행렬에 동원된 교방악관은 고취 연주자들이고, 안국기 · 고창기 · 천축기 · 연악기는 642년(당 정관 16)에 제정된 10부악(十部樂) 중의 기악(伎樂)으로서 역시 중국의 속악이라는 점에서 고려 교방에 소속된 악무대임이 분명하다.

위장행렬에 동원된 음악 종목과 인원수를 통해 당시 당악의 규모가 확인된다. 원 간섭기로 접어든 1301년(충렬왕 27)에 무도(舞蹈)를 없앴는데, 이 때 안국기, 잡기, 고창기, 천축기, 연악기가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당악 유입은 문종(文宗) 때 송조의 속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활발해졌다. 문종은 송 신종 희령(煕寧) 연간[1068~1077]에 송조에 악공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온 송조의 악공은 수년간 고려에 머무르면서 당악을 가르쳤다. 그 후에도 송나라로 사신 갈 때면 반드시 재물을 가져가서 송조의 악공들을 관사로 초빙하여 음악을 배워오곤 하였다.

1073년(문종 27) 2월에는 “연등회에 여제자 진경(眞卿) 등 13명이 전해준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쓰자”는 교방의 상주(上奏)를 따랐고, 같은 해 11월의 팔관회(八關會)에서는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이 새로 전해 받은 「포구락」, 「구장기별기」를 올렸는데, 「포구락」은 13명, 「구장기별기」는 1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077년(문종 31) 2월의 연등회(燃燈會)에서는 교방 여제자 초영이 55명으로 구성된 「왕모대가무」를 올렸는데, 춤으로 ‘군왕만세(君王萬歲)’ 혹은 ‘천하태평(天下太平)’ 4자를 연출하였다. 「왕모대가무」는 바로 무대(舞隊)의 대형(隊形)을 이용하여 각종 글자 모양을 이루는 일종의 자무(字舞)였다.

문종은 이후 신종 원풍(元豐) 연간[1078~1085]에도 악공을 구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당악이 극성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문종은 1076년(문종 30)에 관현방(管絃房)을 신설하는 동시에 대악서를 재정비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의 왕실 음악 기구를 대악국(大樂局)[혹은 대악사(大樂司)]과 관현방(管絃坊)이라 칭하였고, 또 대악사에는 260명, 관현방에는 170명, 경시사(京市司)에는 300여 명의 여기(女伎)가 있다고 하였다. 서긍(徐兢)이 고려를 방문한 1124년(고려 인종 2)에 여기가 소속될 수 있는 음악 기구는 대악서와 관현방 외에 교방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긍이 말하는 경시사란 곧 교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의 수만 보아도 당시 대악서와 관현방 및 교방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긍은 또 고려의 궁정음악에는 당악인 좌방악(左坊樂)과 향악인 우방악(右坊樂)이 있다고 하였다. 즉 당악은 교방 외에 대악서와 관현방의 좌방에서도 연주되었고, 우방에서 연주되었던 향악과 대비되었다. 그리고 그 좌방과 교방의 당악은 용도에 따라 성격이 서로 다른 악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하는 당악이 형식면에서 여기들의 노래와 춤이 위주가 되는 교방악, 노래와 관현악이 위주가 되는 사악(詞樂)으로 구분되는 점을 고려하면, 교방 담당의 당악은 교방악이고, 좌방의 당악은 사악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원 간섭기 이후로 교방은 음악 기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충렬왕 때 왕의 연락(宴樂)에 관현방과 태악, 즉 대악서의 재인만으로 부족하여 여러 도의 관기와 도성 안의 관비 · 무당에서 선발하여 별도로 남장대(男粧隊)를 만든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교방은 음악 기구로서 존속되고 있지 않았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고려사』 악지의 당악은 모음곡으로 구성된 대곡(大曲)과 단독으로 가창하는 산사(散詞)로 대별된다. 앞부분에 수록된 「헌선도」 · 「수연장」 · 「오양선」 · 「포구락」 · 「연화대」 · 「석노교【곡파】」 · 「만년환【만】」등 7종목은 대곡에 속하고, 「억취소【만】」 이하 「해패【령】」까지는 모두 산사에 해당한다. 7종 대곡 가운데 앞의 5종 정재는 절차와 곡 이름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었지만, 「석노교【곡파】」와 「만년환【만】」은 가사만 수록되었기 때문에 공연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러한 당악에는 문종 때 유입된 교방악 중 오직 「포구락」만 포함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전승이 단절되었다. 문종대에 유입된 교방악이 대부분 실전된 점으로 볼 때,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당악은 주로 예종 때 북송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이 보내온 대성신악일 가능성이 크다. 휘종이 북송의 속악인 대성신악을 보내올 때 10책의 곡보(曲譜)도 함께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유입 직후 약 4개월 뒤에 신악과 향악을 태묘에 병용하도록 하였고, 5개월 뒤에는 함원전의 연회에서 신악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성신악은 유입되던 해에 이미 용도가 정해지고, 그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져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의 유입과 함께 여러 당악기도 유입되었다. 1114년(예종 9)에는 북송 휘종이 주2을 비롯한 15종의 당악기와 곡보 10책, 주3 10책을 보내주었다. 이 악기들은 1113년에 북송 휘종 때의 음악 전담 기구인 대성부(大晟府)에서 새로 제작한 연악용 신악기들이다.

당시 휘종은 이 악기들을 새로 만든 대성악과 함께 교방과 균용직(鈞容直) 및 개봉부(開封府)에 반포한 뒤, 종래의 구악(舊樂)을 일체 금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 이러한 악기들을 모두 활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의 당악에서 주로 사용된 당악기는 방향【철16】 · 퉁소【8공】 · 적【8공】 · 피리[觱篥]【9공】 · 비파【4현】 · 아쟁【7현】 · 대쟁【15현】 · 장구[杖鼓] · 교방고 · 박【6매】 등 10종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조로 전승된 고려의 당악은 건국 이후 조회와 연향에 활발히 연주되었다. 1402년(태종 2)에 예조와 의례상정소가 함께 정해 올린 조회악과 연향악에는 다량의 당악이 포함되어 있다. 국왕연사신악(國王宴使臣樂)의 경우, 「오양선」 · 「연화대」 · 「포구락」정재가 추어지고, 「하성조령」 · 「수룡음」 · 「금잔자」 · 「억취소」가 기악곡으로 연주되었다.

그리고 가악(歌樂)은 풍시(風詩)와 접목하여 「중강」에는 녹명(鹿鳴)을, 「전화지」에는 황황자화(皇皇者華)를, 「금전악」에는 사모(四牡)를, 「하운봉」에는 어리(魚麗)를, 「수룡음」에는 신공(臣工)을, 「낙양춘」에는 남유가어(南有嘉魚)를 노래 불렀다. 이것들은 모두 고려 말의 아악서와 전악서에서 전하던 당악 중에서 선정한 것들로서 「하성조」와 「중강령」 및 「금잔자」는 각각 고려 교방악 「연화대」와 「수연장」 및 「헌선도」의 반주음악에서 취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산사에서 취하였다.

특히 가악은 고려의 사악에서 쓰인 노래 말을 모두 시경의 시로 바꿈으로써 시악화를 이루었다. 그 밖의 연례에도 당악이 편성되었지만 국왕연사신악에 비해 그 수가 적고, 종목도 국왕연사신악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종대[1418~1450]에 이르러 조선조 아악이 새로이 창제됨에 따라 아악서에서는 비로소 진정한 아악을 전담하고, 전악서에서는 속악을 전담하되 좌방은 당악, 우방은 향악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악이 부흥됨에 따라 당악은 향악과 함께 타격을 받긴 하였으나 여전히 기악, 가악, 정재의 형태로 연주되었고, 문소전 등의 제례에 작헌악으로도 연주되었다.

선초에는 새로운 당악과 당악정재도 창제하였다. 성종대의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고려에서 전승된 정재 외에 「금척」 · 「수보록」 · 「근천정」 · 「수명명」 · 「하황은」 · 「하성명」 · 「성택」 · 「육화대」 · 「곡파」 등 9종의 당악정재가 수록되어 있다. 「몽금척」의 약칭인 「금척」과 「수보록」은 정도전(鄭道傳)이 1393년(태조 2)에 전악서 무공방(武功房)의 시연과 함께 올린 신악(新樂)이고, 「근천정」, 「수명명」은 1402년(태종 2)에 하륜(河崙)이 지어올린 악장으로 1411년(태종 11)에 인군과 신하가 함께 잔치하는 예도[君臣同宴禮度]에 수장(首章)으로 채용된 바 있다.

정도전과 하륜의 악장에 기하여 이루어진 4종 당악정재는 이후 1432년(세종 14)에 정해진 회례의주(會禮儀注)에도 「하황은」과 함께 회례악으로 쓰였다. 「하성명」은 1419년(세종 1)에 변계량(卞季良)이 지어 올렸고, 「성택」은 1428년(세종 10)에 의식 절차가 정해졌으며, 「곡파」는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실전되었다가 1425년(세종 7)에 그 무악(舞樂)을 기억하는 노기(老妓)에 의해 복원되었다.

『악학궤범』에만 전하는 「육화대」는 세종 이후 성종 사이에 창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새로운 당악정재를 창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 전승된 5종 정재도 고려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정비하였다.

또한 『세종실록악보』의 「여민락」과 『세조실록악보』의 진찬악 「풍안지악」도 당대(當代)에 새로이 창작된 당악곡이다. 「여민락」은 「봉래의(鳳來儀)」의 한 악곡이고, 「풍안지악」은 세조가 친제한 악곡으로 종묘제례의 진찬 뿐만 아니라 철변두(撤籩豆)와 송신(送神)의 절차에서도 각각 「옹안지악」과 「흥안지악」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었다. 두 악곡을 통하여 조선 전기에 중국 속악의 2종 악조, 즉 연악 7음음계로 알려진 ‘속악조’와 청악 7음음계로 알려진 ‘신음계(新音階)’, 즉 ‘하치조(下徵調)’의 당악곡들이 연주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1471]에는 38곡의 당악 취재 곡목이 명시되었는데, 그 중 26곡은 고려 당악에서 연원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 전기에 새로이 창작한 악곡들이다. 그런데 「삼진작보」 · 「여민락령」 · 「여민락만」 · 「낙양춘」 · 「보태평」11성 · 「정대업」11성 · 「진찬악[풍안곡]」 · 「전인자」 · 「후인자」 · 「정동방」 · 「환궁악」 · 「금전악」 등은 향악 취재 곡목에도 포함되어 있고 「성수무강인자」는 향악 취재 곡목에 「성수무강」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향악 · 당악의 취재 곡목에 공통으로 포함되어 있는 악곡들은 향악기 · 당악기의 혼합 편성 상황을 말해주므로 이를 통하여 당시 향악 · 당악 융합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447년(세종 29)에 정한 평상시에 사용하는 속악[시용속악(時用俗樂)]에도 문소전(文昭殿)과 광효전(廣孝殿)의 삼헌악 5곡과 당악 11곡이 포함되었다. 당시 문소전과 광효전의 초헌악인 「환환곡」과 「미미곡」은 각각 태조(太祖)태종(太宗)을 제사할 때 쓰인 초헌악의 미칭으로서 그 선율이 당악 「중강령」이므로 당악의 범주에 든다.

반면, 아헌악의 미칭인 「유황곡」과 「유천곡」은 그 선율이 향악 「풍입송」이고, 종헌악인 「정동방곡」은 고려가요 「서경별곡」에서 연원하였지만 향악 · 당악 겸용의 악곡이다. 따라서 세종 말에 정한 평상용의 속악 중에는 고려 전래 당악 11곡과 「환환곡」 · 「미미곡」 · 「정동방곡」을 합하여 모두 14곡이 당악이다.

이후 1759년(영조 35)에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편집한 『대악전보(大樂前譜)』에는 「보허자(步虛子)」와 「낙양춘(洛陽春)」을 비롯한 15곡의 당악곡이 수록된 것으로 전한다. 『대악전보』는 세종대의 음악을 수록한 악보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1447년(세종 29)에 정한 시용속악에 비해 배제된 악곡도 있고, 추가된 악곡도 있어 서로 차이가 있다.

양란 이후로 조선조의 궁정음악은 치명타를 입었고 당악 역시 쇠퇴일로로 치달았다. 1795년(정조 19)에 봉수당(奉壽堂)에서 베푼 연회에서 「금척」 · 「수명명」 등 12종의 정재에 「여민락」 등 10곡이 반주곡으로 쓰였다. 그러나 「여민락」은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를 불문하고 5종 정재와 「처용무」에 두루 연주되었고, 「낙양춘곡」이 향악정재인 「첨수무」에 연주되는 등 이 시기에 이미 당악정재에는 당악을, 향악정재에는 향악을 반주했던 조선 전기의 전통이 무너져 있었다.

특히 「향당교주」는 조선 전기의 향악기 · 당악기 혼합 편성의 의미를 벗어나 하나의 악곡명으로 새롭게 출현하였다. 순조 때에는 「첨수무」의 반주음악도 이 「향당교주」로 대체된다.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수록되어 전하는 「관악영산회상」이 「향당교주」라는 곡명으로 「처용무」 반주에 쓰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대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1893년]에서도 당악정재의 반주악으로 「향당교주」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 곡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관악영산회상」의 「상영산」으로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개항기에 이르러 당악은 거의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개항기의 『속악원보』에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중 「풍안지악」, 경모궁제례악(景慕宮祭禮樂) 중 「혁우곡」 · 「보허자」 · 「낙양춘」 · 「여민락만」 · 「(여민락)령」만 수록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여민락)령」도 조선 후기부터 이미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으로 활용되는 등 향악화되어 온 지 오래이다.

비록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때 「장생보연지무」 등 4종 당악정재가 창제되기는 하였지만, 그 반주음악이 당시 이미 당악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악의 부흥을 이끌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실정은 오늘날로 그대로 이어져 현재 고려 전래의 당악 중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만 남았고, 「여민락만」 · 「령」과 함께 ‘당피리 중심의 음악’에서 핵심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당악은 『속악원보』의 6곡과 「정동방곡」 등이다. 「풍안지악」과 그 축소곡인 「혁우곡」은 제례악이고, 「보허자」 이하 5곡은 관악합주곡으로서 모두 황종(黃鍾)의 음고가 ‘c’라는 공통점이 있다. 세종대에 창작된 「여민락만」은 「만」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되고 있으며, 「령」은 그 악곡에서 「해령」이라는 새로운 악곡이 파생되어 나오자 ‘본래의 「령」’이라는 의미의 「본령」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되고 있다. 세조 때 창작된 진찬악 「풍안지악」에서도 「혁우곡」이 파생되어 나왔으며 여전히 종묘제례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연주되고 있다.

「보허자」 이하 5곡의 관악곡들은 본래 황종의 음고가 ‘c’인 점, 당피리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악기 편성이 당피리 · 당적 · 대금 · 해금 · 장구 · 방향 · 북인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5곡의 당악곡들은 20세기 이후 본래의 기능을 잃고 무대용 연주음악으로 바뀌게 되면서 기존의 방향(方響)이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으로 대체되었고, 그 편성 규모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황종의 음고가 c인 점’, ‘당피리가 중심이 되는 점’에서는 여전히 당악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편, 중국 전래의 「보허자」는 「낙양춘」에 비해 향악화가 많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밑도드리」 · 「웃도드리」 · 「양청도드리」 · 「우조가락도드리」 등의 파생곡들이 생겨났다. 4곡의 파생곡들은 모두 향악의 황종 음고인 ‘eb’에 맞추어 연주하되, 「밑도드리」는 규모가 큰 관현악곡으로, 나머지 3곡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세악(細樂) 편성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 곡들에 사용되는 피리는 향피리와 세피리이며 당피리는 사용되지 않는다.

또 별도로 현악기로만 연주하는 「보허사(步虛詞)」가 있어 관악기로만 연주하는 「보허자」와 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악곡들을 통칭하여 「보허자」계 악곡들이라 하는데 「보허자」만 황종의 음고가 ‘c’이고, 나머지는 모두 ‘eb’이다. 「보허사」는 황종의 음고가 ‘eb’인 향악곡이기는 하지만, 그 거문고 악보는 오히려 고악보 중의 옛 「보허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여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참고문헌

원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고려사(高麗史)』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악학궤범(樂學軌範)』
『정조실록(正祖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신당서(新唐書)』
『송사(宋史)』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단행본

『피리정악보[觱篥正樂譜]』(국립국악원, 2015)
이혜구, 『(신역)악학궤범』(국립국악원, 2000)
『국악전집』 7(국립국악원, 1979)
欧兰香, 「宋代词乐东传的踪迹」(『当代韩国』, 2011)
馮文慈, 『中外音樂交流史』(湖南敎育出版社, 1997)
文河淵, 「朝鮮的音樂遺産」(『朝鮮古代音樂家朴堧和朝鮮的音樂遺産』, 音樂出版社, 1960)

논문

정화순, 김인숙, 「선초 속악의 7음음계에 관한 연구」(『한국음악사학보』 69, 한국음악사학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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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옥, 「만파식적과 삼죽의 연원: 신라의 관악기를 중심으로」(『한국음악연구』 60, 한국국악학회, 2016)
서한범, 「처용무 반주 음악의 양상: 정재반주로의 수제천과 관악 상령산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한국음악사학보』 43, 한국음악사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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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비문(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文)」
주석
주1

중국 송나라 때에 구양수·송기(宋祁) 등이 편찬한 당나라의 정사(正史).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의 하나로, ≪구당서≫에 빠진 것과 틀린 것을 바로잡아 펴낸 책이다. 225권. 우리말샘

주2

당악기(唐樂器)에 속하는 타악기의 하나. 16개의 철편(鐵片)을 틀의 상단과 하단에 8개씩 매어 놓고 망치 모양의 각퇴(角槌)로 쳐서 소리를 낸다.

주3

현악기나 관악기의 손 짚는 법을 그림과 함께 적은 책.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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