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번은 1917년부터 사용된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다. 기생조합은 갑오개혁 이후 가무 여성들이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근대적 전문 집단으로 자리 잡으며 형성되었다. 1910년대 이후 기생조합은 조직 체계를 갖추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17년 이후 명칭이 권번으로 바뀌고 일부는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통제와 전시 체제로 활동이 위축되었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조직은 점차 해체되었다. 권번은 전통예술 전승·교육의 중심지였으며 신민요 창출 등 근대 대중음악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인하여 가무 전문 여성들은 신분적 ·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났고, 1902년부터 시작된 극장 흥행은 이들의 예술을 근대적 방식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에 경시청령 5호로 발표된 「기생단속령」은 이들을 근대적 전문집단이자 이익집단임을 인정했지만 가무 활동과 무관한 통제를 받게끔 강제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이 법을 수용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했다.
1908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기생조합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기생 조직체였다. 이에 전국의 여성들이 대거 상경했고 그 결과 다양한 기생조합이 결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1913년 결성된 다동기생조합은 첫 무부기(無夫妓) 조합, 즉 독신 여성들의 집합체로 주목받았다. 이후로 생겨난 기생조합은 다동기생조합을 모범으로 삼게 되었다.
1916년에 경무총감부령 제3호로 「예기작부예기치옥영업취체규칙(藝妓酌婦藝妓置屋營業取締規則)」이 발표될 무렵 「기생단속령」 시행에서 나타난 모순은 다소 바로 잡히기도 했지만, 제도적 강제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기생조합은 가무 전문 여성들의 조직체로 안착하게 되었다.
1917년부터 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은 서울의 한남기생조합을 시작으로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또한 1920년부터 한남권번을 시작으로 기생들의 조직체는 동종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연합체로서가 아니라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권번이 만들어져 성업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조합의 활동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서울의 일부 권번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기도 했고, 1941년 주1 발발 후부터는 조직의 운영과 존속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는 주2라는 통폐합된 기생 조직이 등장했고, 1946년에는 소속 기생들이 과거 일제의 강제, 즉 신체 검사라는 강요에 저항하기 위해 총파업을 단행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서 이들의 가무 활동은 회복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기생을 조직화하는 제도는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생 조직도 해체되었다.
권번의 교육 과정은 조합의 사정이나 시대,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게 운영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의 경우처럼 규모가 큰 조직에서는 일반 학교의 교육 과정과 가무악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는 가무악 전문 교육 과정만 운영했다.
권번은 가무악에 관한 전문적인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근대적 조직체이자 공연 주선과 가무 활동에의 보상 등을 관리했던 이익집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공연예술 유산을 전승 ·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신민요 같은 근대적 · 대중적 가창 갈래를 만들 수 있는 요람이 되기도 했고, 외래의 가무를 수용하는 주체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기생조합이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다양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요인은 이들이 받은 체계적인 학습 때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