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번 ()

조선권번 예기양성소
조선권번 예기양성소
국악
제도
1917년부터 사용된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
이칭
이칭
기생조합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917년
폐지 시기
1948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권번은 1917년부터 사용된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다. 기생조합은 갑오개혁 이후 가무 여성들이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근대적 전문 집단으로 자리 잡으며 형성되었다. 1910년대 이후 기생조합은 조직 체계를 갖추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17년 이후 명칭이 권번으로 바뀌고 일부는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통제와 전시 체제로 활동이 위축되었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조직은 점차 해체되었다. 권번은 전통예술 전승·교육의 중심지였으며 신민요 창출 등 근대 대중음악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의
1917년부터 사용된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
개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인하여 가무 전문 여성들은 신분적 ·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났고, 1902년부터 시작된 극장 흥행은 이들의 예술을 근대적 방식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에 경시청령 5호로 발표된 「기생단속령」은 이들을 근대적 전문집단이자 이익집단임을 인정했지만 가무 활동과 무관한 통제를 받게끔 강제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이 법을 수용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했다.

성립 과정

1908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기생조합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기생 조직체였다. 이에 전국의 여성들이 대거 상경했고 그 결과 다양한 기생조합이 결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1913년 결성된 다동기생조합은 첫 무부기(無夫妓) 조합, 즉 독신 여성들의 집합체로 주목받았다. 이후로 생겨난 기생조합은 다동기생조합을 모범으로 삼게 되었다.

1916년에 경무총감부령 제3호로 「예기작부예기치옥영업취체규칙(藝妓酌婦藝妓置屋營業取締規則)」이 발표될 무렵 「기생단속령」 시행에서 나타난 모순은 다소 바로 잡히기도 했지만, 제도적 강제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기생조합은 가무 전문 여성들의 조직체로 안착하게 되었다.

운영 및 해체 과정

1917년부터 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은 서울의 한남기생조합을 시작으로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또한 1920년부터 한남권번을 시작으로 기생들의 조직체는 동종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연합체로서가 아니라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권번이 만들어져 성업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조합의 활동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서울의 일부 권번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기도 했고, 1941년 주1 발발 후부터는 조직의 운영과 존속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는 주2라는 통폐합된 기생 조직이 등장했고, 1946년에는 소속 기생들이 과거 일제의 강제, 즉 신체 검사라는 강요에 저항하기 위해 총파업을 단행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서 이들의 가무 활동은 회복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기생을 조직화하는 제도는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생 조직도 해체되었다.

권번의 교육 과정은 조합의 사정이나 시대,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게 운영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의 경우처럼 규모가 큰 조직에서는 일반 학교의 교육 과정과 가무악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는 가무악 전문 교육 과정만 운영했다.

의의 및 평가

권번은 가무악에 관한 전문적인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근대적 조직체이자 공연 주선과 가무 활동에의 보상 등을 관리했던 이익집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공연예술 유산을 전승 ·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신민요 같은 근대적 · 대중적 가창 갈래를 만들 수 있는 요람이 되기도 했고, 외래의 가무를 수용하는 주체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기생조합이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다양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요인은 이들이 받은 체계적인 학습 때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보고사, 2012)
이창배, 『한국가창대계』(홍인문화사, 1976)

논문

권도희, 「대한제국기 이후 삼패의 정치학-“안진소리”의 기호적 의미」(『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8,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9)
권도희, 「대한제국기 황실극장의 대중극장으로의 전환 과정에 대한 연구: 희대·협률사를 중심으로」(『국악원논문집』 32, 국립국악원, 2015)
권도희, 「기생의 가창 활동을 통한 근대에의 대응」(『한국시가연구』 32, 한국시가학회, 2012)
권도희, 「20세기 기생의 가무와 조직: 근대기생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한국음악연구』 45, 한국국악학회, 2009)
권도희, 「기생조직 해체 이후 여성음악가들의 활동」(『동양음악』 25,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2003)
주석
주1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이 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우리말샘

주2

해방 직후, 삼화권번(三和券番)과 서울기생조합을 통합해서 발족한 사설 기생조합. 예성사의 부설양성소에서는 최상욱(崔相旭)이 가사·시조를, 최정식(崔貞植)과 이창배(李昌培)가 잡가·민요를 가르쳤다.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