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권번은 1917년부터 사용된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다. 기생조합은 갑오개혁 이후 가무 여성들이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근대적 전문 집단으로 자리 잡으며 형성되었다. 1910년대 이후 기생조합은 조직 체계를 갖추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17년 이후 명칭이 권번으로 바뀌고 일부는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통제와 전시 체제로 활동이 위축되었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조직은 점차 해체되었다. 권번은 전통예술 전승·교육의 중심지였으며 신민요 창출 등 근대 대중음악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의
1917년부터 사용된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
개설
성립 과정
1916년에 경무총감부령 제3호로 「예기작부예기치옥영업취체규칙(藝妓酌婦藝妓置屋營業取締規則)」이 발표될 무렵 「기생단속령」 시행에서 나타난 모순은 다소 바로 잡히기도 했지만, 제도적 강제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기생조합은 가무 전문 여성들의 조직체로 안착하게 되었다.
운영 및 해체 과정
1920년대부터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권번이 만들어져 성업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조합의 활동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서울의 일부 권번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기도 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부터는 조직의 운영과 존속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는 예성사(藝星社)라는 통폐합된 기생 조직이 등장했고, 1946년에는 소속 기생들이 과거 일제의 강제, 즉 신체 검사라는 강요에 저항하기 위해 총파업을 단행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서 이들의 가무 활동은 회복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기생을 조직화하는 제도는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생 조직도 해체되었다.
권번의 교육 과정은 조합의 사정이나 시대,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게 운영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의 경우처럼 규모가 큰 조직에서는 일반 학교의 교육 과정과 가무악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는 가무악 전문 교육 과정만 운영했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단행본
-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보고사, 2012)
- 이창배, 『한국가창대계』(홍인문화사, 1976)
논문
- 권도희, 「대한제국기 이후 삼패의 정치학-“안진소리”의 기호적 의미」(『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8,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9)
- 권도희, 「대한제국기 황실극장의 대중극장으로의 전환 과정에 대한 연구: 희대·협률사를 중심으로」(『국악원논문집』 32, 국립국악원, 2015)
- 권도희, 「기생의 가창 활동을 통한 근대에의 대응」(『한국시가연구』 32, 한국시가학회, 2012)
- 권도희, 「20세기 기생의 가무와 조직: 근대기생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한국음악연구』 45, 한국국악학회, 2009)
- 권도희, 「기생조직 해체 이후 여성음악가들의 활동」(『동양음악』 25,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200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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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이 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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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해방 직후, 삼화권번(三和券番)과 서울기생조합을 통합해서 발족한 사설 기생조합. 예성사의 부설양성소에서는 최상욱(崔相旭)이 가사·시조를, 최정식(崔貞植)과 이창배(李昌培)가 잡가·민요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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