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 출신 기생들이 남도가무를 장기로 결성한 한남기생조합이 1918년에 한남권번으로 개칭되었다. 한남권번은 1935년 종로권번으로 통폐합되었다.
남도 출신 기생들의 가무와 이익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단체.
20세기 벽두부터 서울에 극장과 기생조합이 생겨나면서 타지역 출신 기생들이 속속 상경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초까지 서도 기생에 비해 남도 기생은 지역의 정체성을 앞세워 정착하기 어려웠다. 1913년에 다동기생조합이 결성될 때 남도기생은 서도기생과 연합했지만, 기생 수나 조직 내 지도력 등에 있어서 서도기생을 앞설 수 없었다. 그러나 극장 공연에 있어서는 남도기생이 서도 기생을 앞서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다동기생조합 내에서 서도기생과 남도기생의 갈등을 야기시켰다. 이에 다동기생조합의 구성원들 가운데 극장 공연을 통해 명성을 떨쳤던 남도기생들은 따로 새 조합을 결성했다. 이것이 1917년에 설립된 한남기생조합이었다. 1918년에 한남권번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1935년에 한남권번은 대항권번 및 경성권번과 함께 종로권번으로 강제 통폐합되었다.
한남권번의 초기 공연물 중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다동기생조합에서 남도 출신 기생들에 의해 계발되었던 레퍼토리였다. 다동조합 소속이었던 김남수와 현계옥 등은 극장 공연시 「춘향 연극」을 시도했던 최초의 기생들이었는데, 이들이 한남권번으로 이적하면서 이 레퍼토리를 더욱 발전시켜 한남권번의 인지도를 높였다. 한편, 이화중선 역시 한남기생조합 성립 전에 이미 남도창으로 명성을 얻었던 인물이었는데 한남권번에 소속함으로써 한남권번의 명성을 드높였다. 이후로도 한남권번은 그 수는 적었지만 박녹주 등과 같이 개성 있고 재능 있는 구성원이 참여함으로써 서울 장안의 주요 기생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수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1935년 일제의 권번 통폐합의 강제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일제는 1930년대 중반에 서울에 있었던 여러 개의 권번을 두 개의 권번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그러나 저항이 매우 심해서 그 중 중소규모였던 한남, 대항, 경성권번 세 권번만을 종로권번으로 강제 통폐합했다. 이후로 남도 음악계의 여류급 인물들은 종로권번에 소속하지 않고 조선성악연구회라는 전문 조직을 만들고 이를 근거로 활동을 했다.
1910년대 이후 한남기생조합이 만들어짐으로써 남도 출신 기생들이 서울에서 공연활동을 안정적으로 벌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는 남도음악이 서울 음악계에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