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인구락부는 야주현(현재 새문안 교회터)에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 장소는 1902년 고종황제의 등극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의식을 치르기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칭경의식이 무산되면서 이 공간은 희대, 즉 민간의 흥행 극장으로 기능했다. 민간의 흥행에 관청과 관인을 동원하는 것은 당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1906년에 봉상시 소속 이필화의 상소로 흥행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불법적 흥행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 야주현 희대 장소에 새롭게 설립된 기관이 관인구락부였다. 관인구락부는 관료들의 고급사교장으로 설립되었지만, 그 목적과 달리 1907년 12월부터 공식적으로 민간 흥행 공연을 벌였다. 1908년 1월에 관인구락부가 남대문으로 이전하면서 공연은 하지 않았다.
1907년 1월에 관료들을 위한 유료 클럽으로 운영한다는 명분으로 관인구락부가 설치되었지만, 같은 해 12월에 경시청은 서서(西署) 소관의 야주현에 있는 이 건물을 연극장으로 사용할 것을 허가했다. 즉, 관인구락부는 1907년 12월부터 법적으로 대중 공연장이 되었다. 그러나 관인구락부가 공연장으로 사용된 것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이었다.
1907년 1월에 조남익(趙南益)·김용제(金鎔濟)·서정악(徐廷岳) 등은 야주현 소재 극장(협률사 혹은 희대)을 관인구락부로 사용할 것을 발기했다. 발기인 중 김용제는 1903년 이후 희대에서 치러질 칭경의식을 준비했던 관원 중 하나였다. 발기 이후 한동안 공연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1907년 12월 24일부터 흥행을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흥행 공연 한 달 후인 1908년 1월에 관인구락부는 남대문으로 이전했고 거기서는 흥행을 하지 않았다. 또한 야주현 관인구락부가 있었던 자리는 민간 극장인 원각사가 되었다.
관인구락부의 공연은 희대 혹은 협률사의 공연 관행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공연물 계발에도 힘썼다. 관인구락부의 주요 공연 종목은 궁중가무였고, 이 외에 다양한 민간 공연물을 추가했다.
관인구락부의 설립이 공연예술사에서 주목되는 이유는 공연 종목이 전 시기보다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관인구락부 시절에 특별히 주목되는 종목은 민간의 공연물 가운데 평양 날탕패의 공연이다. 즉, 관인구락부는 전 극장보다 적극적으로 민간의 공연물을 도시적 흥행물로 계발하면서 초기 극장의 발전을 견인했다. 이러한 사례는 관인구락부 공연 전후로 설립된 민간 극장에 모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