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에 평양기생들을 주축으로 다동기생조합이 만들어졌고, 이를 계기로 평양 외 여러 지방 기생들이 서울에 근거지를 갖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다동기생조합이 대정권번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운영진과 운영방법 그리고 구성원에 변화가 생겼다. 1918년 이전까지 다동기생조합은 평양 기생들이 주도권을 장악했고, 당대의 명가객이었던 하규일의 지도 아래 일관성 있게 정통적인 가무와 창작 공연을 시도하면서 빠르게 명성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대정권번으로 개칭되면서 하규일은 안순환에 의해 지도력을 억압당했고, 조합의 운영도 독자적 운영이 아니라 고리대금업 회사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기생들의 활동상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정권번은 지역에 따라, 즉 서울 출신 기생들 그리고 남도출신 기생들 및 평양 출신 기생들로 분열되었다. 이 중 평양 출신 기생들이 따로 대정권번에서 빠져 나와 독립된 기생조직을 만든 것이 대동권번이었다.
1920년대 이후 기생조직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평양 출신 기생들로만 구성된 조직체를 만들기 위해 대동권번이 설립되었다.
대동권번은 1921년 4월에 단성사에서 첫 공연을 치렀다. 단성사에서의 첫 공연은 노래와 연극 위주로 꾸며졌다. 대동권번은 다동기생조합의 도전 정신을 이어 받아 신파극과 희극을 기획할 만큼 진취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대동권번은 전성기에 200여명이 소속했을 만큼 규모가 큰 권번이었다.『조선미인보감』(1918)에 대정권번의 기생 수가 182명이었던 것을 보면, 1920년대 초 대동권번의 규모는 가히 장안의 최대라고까지 할만하다. 이처럼 대동권번은 공연역량 및 기생 수 등에서 1920년대 초 장안의 대표 권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동권번은 1923년 10월까지는 화려한 공연을 펼쳤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공연을 벌이지 않았다. 1924년 『개벽』의 기사에 의하면, 대동권번은 당시 간판만 있고 폐지된 상태라고 적고 있다. 즉 빠르게 성장하고 해체된 권번이라고 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화려하고 장대한 활동을 벌였던 대동권번이 갑자기 쇠락한 이유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비록 대동권번이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1910년대 초 무부기조합의 기치를 내세웠던 평양출신 기생들의 기개를 이어받았고 한편으로는 진취적으로 새로운 공연을 시도했던 다동기생조합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