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월부터 서울에서는 기존의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13년에 설립된 다동기생조합은 1918년 1월에 대정권번으로 개칭되었다. 대정권번이 되면서 다동기생조합의 운영방식과 진용은 바뀌었다.
다동기생조합의 운영 체계를 바꾸기 위해 대정권번으로 개명했다.
다동기생조합 시절에는 기생들의 가무 학습과 공연 기획에 있어서 당대 절정 가객이었던 하규일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하규일은 가무는 물론이고 기생조합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정권번이 되면서 조합 운영 및 관리에 있어서 하규일의 지위는 흔들렸다. 대정권번 운영에 안순환이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안순환은 최초의 근대적 조선 요리점 명월관을 만들었던 사업가였다. 하규일과 안순환이 권번의 운영을 두고 충돌했던 것은 두 사람의 목표가 달라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규일은 다동기생조합의 각종 공연을 성공시킨 주역이자 당시 조선 가무의 대가였기 때문에 가무를 중시했고, 안순환은 대정권번 설립 당시 송병준과 관계를 맺으며 대성사(大成社, 고리대금업)로 하여금 권번의 관리를 맡도록 했다. 대성사는 송병준이 경영했던 회사였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의 권번 운영 목표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정권번에 대한 관리가 최종적으로 안순환에게 맡겨지면서 하규일은 1920년대 초에 대정권번을 떠났다. 이 때 하규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에 동의했던 다수의 기생들도 그와 함께 대정권번을 빠져 나왔고, 한편으로 하규일과 무관했던 상당수의 기생들 중 평양출신 기생도 대정권번으로부터 이탈했다. 이 과정에서 대정권번의 유지와 운영은 곤란해졌다. 이에 홍병은(洪炳殷)이 주선해서 대정권번의 권리를 송병준으로부터 일본인 나가노(長野)에게 넘겼다. 나가노는 자본금 5,000원으로 대정권번의 운영방식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그러나 사실상 대정권번은 나가노의 독자경영이었으며 나가노가 경영하는 계림사(鷄林社)에서 관리했다.
1918년에 간행된 『조선미인보감』에 의하면, 대정권번 초기의 구성원을 대강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대정권번 초기에는 182명의 기생이 있었는데, 평안도 출신 기생이 가장 많고, 그 외에 서울, 경상도, 전라도 기생 순이다. 하규일과 그를 따르던 다수의 기생들이 빠져나간 후에도 대정권번은 공연 활동을 벌였지만, 다동기생조합 시절처럼 성공적이고 역동적이지는 못했다. 즉, 공연의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받는다거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등의 공연 활동은 전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정권번은 1929년까지 지속되었다.
대정권번은 그 운영에 있어서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이 관여하도록 만들었던 조직이다. 이 때문에 조직은 분열되었고, 공연예술 역량도 감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