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서울의 시정(市井) 음악을 담당했던 여성음악가들은 기녀, 삼패, 사당패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행 레퍼토리와 학습과정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향유자의 미적 취향과 경제력에 의해 기녀, 삼패, 사당패 순으로 계급화되어 있었다. 이 집단 중 기녀와 삼패는 20세기 이후 재구성된다. 경성예창기조합은 삼패를 중심으로 결성된 조합을 말한다. 19세기 후반까지 삼패의 노래는 서울의 중간 계급 및 그 주변 계층에서 향유되었지만, 20세기에는 계급적, 예술적 한계가 사라지게 되었다. 예창기라는 명칭은 이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적이고도 부당한 명칭이었다. 즉, 경성예창기조합은 경성의 삼패 출신 음악가들이 근대사회에 재조직화 되었던 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패들은 20세기 이후 근대적 제도 하에서 재조직되었다. 1908년 6월 5일 삼패들이 경시청에 조합 설립의 허가를 청원한 서류에 의하면, 이들은 자신의 집단 명칭을 ‘경성예창기조합’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세간에서는 서류상의 명칭과 달리 이들을 시곡기생조합 혹은 예기조합이라고 불렀다. 삼패 집단에 대한 법적·사회적·관례적 명명이 달랐던 이유는 이들의 정체에 대한 법적 이해와 사회적·관례적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1902년 이후 삼패들은 협률사에서 관기 혹은 그에 준하는 기녀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그러나 1904년 이후로는 일제의 관여 하에서 삼패는 창기로 분류되었고 그 결과 위생 단속의 표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삼패들은 시곡(지금의 서울 시동) 주변에 살도록 강제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을 부를 때는 세간에서 시곡 기생이라 불렀다. 그런데 시곡 기생들은 일제의 단속과 무관하게 공연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를 끊임없이 확장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부당하게 구속하는 법령에 저항했고 그 결과 1916년 법적인 기생이 되었다.
1906년 훈도방 시곡에 건강진단소조합이 설치되었다. 같은 장소에서 1908년 7월 김명완을 대표로 하는 경성유녀조합 혹은 경성예창기 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경시청의 허가를 받지 못했고, 1909년 8월에는 한연심을 대표로 하여 그 명칭을 창기조합으로 개정한 후 경시청의 운영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1912년 전후로 전문적인 가무학습을 강화하는 한편 조직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1915년에 시곡 기생조합은 신창기생조합이 되었고, 1916년 5월에는 불합리한 법적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갑종 기생조합이 되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일제가 조선을 공창화하려는 기획을 구체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당하게 지목되었던 것이 삼패였다. 삼패는 자신들의 정체에 대한 당시 법과 관례에 저항하기 위해 가무전문가로서의 정체를 선명하게 부각시킴으로써 근대 기생으로서의 정체를 사회적으로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