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탕패는 평양 출신의 남성 전문 공연집단이지만 평양보다는 서울에서 널리 알려졌다. 서울에서 평양 날탕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07년 12월 야주현에 있었던 관인구락부에서의 공연이후였다.『서북학회월보』(1권 16호)에 의하면, 날탕들이 관인구락부에서 공연한 종목은 「앵봉가」, 「사거리」, 「방에타령」, 「담바고 타령」등이었다. 이처럼 산타령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여기에 여러 경서도 잡가를 고루 부른 점에서 날탕패는 조선후기 사당패계 집단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1907년 12월 날탕들의 성공 이후로 서도 잡가는 서울 장안에서 인기 종목이 되었다.
날탕패는 등장 초기에는 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공연했지만, 1910년 이후로는 활동상을 꾸준히 넓혀갔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평양 출신 날탕 문영수(文泳水)는 1911년에 일본축음기상회에서 발매한 첫 레이블에 녹음을 남겼다. 일본축음기상회의 음반에는 당시 서울 사계축 음악 집단의 계승자였던 박춘재(朴春載)와 함께 그의 음악이 녹음되어 있다. 한편, 날탕의 레퍼토리는 서울에서 간행된 『신구유행잡가(新舊流行雜歌)』(1915)라는 잡가집에 “평양날탕패 입창부(平壤苶蕩牌 立唱部)”란 항목 하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판염불」, 「뒷산타령」, 「자진산타령」, 「긴 방아타령」, 「자진난봉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날탕의 인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15년 2월부터 날탕패는 광교기생조합에서 기생들에게 「수심가」 등의 서도민요를 가르쳤다. 이상과 같이 날탕패는 1907년에 서울에 등장하여 1910년대 중반 무렵에 이미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했다.
평양 날탕은 1907년 당시 극장가의 새로운 공연자로 등장하여, 그들 중 일부는 서울 출신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활동을 했고, 서울에서 비서울 출신 음악가들에게 서도음악을 가르쳤으며, 서도소리의 서울 정착에 공헌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날탕패는 사당패계 집단의 해체 후 이를 계승한 새로운 공연집단이며, 서울에서 지방의 소리, 특히 서도소리를 주요 레퍼토리로 정착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