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악연구소 ()

국악
단체
해방 후 안기영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 설립된 전통 음악 및 무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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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후 안기영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 설립된 전통 음악 및 무용연구소.
개설

해방 직후 평양 및 중앙에서 창극 및 기악활동을 전개했던 단체.

연원 및 변천

해방 후 한반도의 음악계는 좌우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전통공연예술인 역시 좌우의 대립 시기에 다양한 행보를 보여주었다. 해방 직전에 서울에서 일제의 개입 하에 설립된 조선음악가협회는 해방 후 해산되었지만 그 해 8월 조선음악가협회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가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했고, 그 산하에 국악건설본부를 두었다. 한편, 좌익 음악가들은 그 해 9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을 건설했는데, 여기에는 양악, 국악 등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나아가, 창극 활동의 경우 해방 후 유치진을 중심으로 우파 예술인들이 한국무대예술원을 결성할 무렵부터 연극계에서 이탈하게 되었는데, 이상과 같은 과정에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출신 남도 음악가들은 다양한 행보를 했다. 그 중 평양에서 남도 음악 단체를 결성한 것이 고전악연구소였다.

기능과 역할

고전악연구소는 전남 나주 출신 안기옥(1894∼1974년)이 초대 소장이었다. 안기옥은 해방 전부터 경성의 남도음악계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었고, 월북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인민배우를 거칠 만큼 인정받았던 음악가였다. 안기옥은 해방 직후 당시 평양 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남도 출신 음악가들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남도음악가 및 무용가들도 통합하여 북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음악활동을 전개했다. 고전악연구소는 김일성이 지지했던 공연단체 즉, 협률단의 기반이 되는 조직으로서, 창극 및 민족기악곡의 창작은 물론이고 민요 발굴을 주도했던 기관이었다. 이 중 고전악연구소의 민요발굴사업은 1956년 이후 작곡가동맹 민족음악분과의 주요 사업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평양음악무용대학의 주요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방 직후 북한의 남도음악 전문기관으로 공연, 창작, 연구, 보존 등의 다양한 활동을 벌였던 기관으로 이해된다. 특히, 고전악연구소를 근거로 북한 지역에서도 남도음악을 기반으로 했던 산조가 연주되고 전승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북한의 전통음악』(황준연·신대철·권도희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조선민족음악가사전』上 (연변대학교출판사, 1998)
『조선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4권, 29권, 1981)
「북한의 민요연구사 개관」 (권도희, 『동양음악』29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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