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동기생조합 ()

국악
단체
1913년에 서울 다동에 설립된 기생조합.
이칭
이칭
무부기조합, 다동조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13년에 서울 다동에 설립된 기생조합.
개설

무부기조합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동기생조합이라는 이름은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기생조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동기생조합이라는 이름은 설립 초부터 불렸던 이름은 아니었다. 다동기생조합 설립 초기에 세간에서는 이 조직을 무부기조합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무부기는 다동조합 설립 이전에도 있었고, 또, 다동조합 설립 이후부터 모든 기생 조합은 무부기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무부기 조합이라고 부른 이유는 다동기생조합이 무부기를 명분 삼았던 기생들이 주동하여 만든 집단이기 때문이다.

다동조합 설립에는 서도 출신 기생들이 중심에 있었지만 실력 있는 남도 출신 기생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동조합을 서도 출신 기생들의 조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동조합의 설립 명분을 주도한 것이 서도 출신 기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도 출신 기생들은 다동 조합 설립 전에는 지방기생들의 서울 정착을 주도하고 조직 내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조합 설립 이후에는 남도출신 기생과 지도력을 경쟁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로 무부기라는 명분이 해체될 무렵 다동기생조합은 조합내의 경쟁 관계 때문에 분열되었다.

설립목적

1910년대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 서울에서는 지방 출신 기생들이 상경하여 장안의 기생 수가 꾸준히 늘어났다. 지방 기생의 상경 및 서울 정착은 서도 출신 기생을 선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방 기생의 서울 정착은 서울 토박이 기생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20세기 이후 서울 출신 기생들은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개척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의 시정음악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오랜 전통을 기반으로 활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 지역 출신 기생들이 집단적으로 서울에 근거지를 갖기 위해서는 이들 서울 출신 기생들에 대응할 만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서도 출신 기생들은 자신의 기예의 성립과 관련된 지역성을 뒤로하고 서울 출신 기생 조직에 조용히 합류하기도 했지만, 1910년 초부터는 자신의 출신과 가무의 정체를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때 이들이 주목한 것이 당시의 기생제도였다. 당시의 제도는 기부(妓夫)가 있는 경우 기생이 될 수 없었다. 기부는 실제 혼인관계에 있는 남편이 아니라 기생의 후원자를 지칭했는데, 20세기 이후부터 경시청은 기부가 있는 자는 기생이 될 수 없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기부는 서울 출신 기생들의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울 출신기생들은 경시청의 강제에 저항했다. 이와는 반대로 서도 출신기생들은 1913년에 기부가 없는 기생임을 자처하고, 나아가 무부기(無夫妓)를 명분으로 세움으로써 타지역 출신 기생들의 서울 정착에 기여했다. 당시 무부기 주장은 “기생계의 혁명”이라고 불렸다. 기생계의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대표적인 기생이 주산월이다.

연원 및 변천

다동기생조합은 설립 초기에는 무부기조합으로 불렸고, 1915년부터는 다동조합이라고 불렸으며, 1918년는 대정권번으로 변화되었다.

기능과 역할

다동조합은 1914년 이후부터 전격적인 공연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연 레퍼토리는 서울 출신 기생들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물론 다동조합은 서울 기생들의 독특한 레퍼토리, 즉 궁중 가무를 공연하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민간 가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주력했다. 예를 들면 관례적으로 금녀의 영역이었던 연희 종목을 수용했고, 당시 새로운 공연물이었던 여성 창극에도 도전했다. 나아가 다동기생조합은 진취적으로 창작 궁중무용 및 서양춤에도 도전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당시 사회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관례적으로 남성의 공연물에 도전했던 경우는 당대 사회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동조합의 대담한 공연 시도들은 당시 신생 조합이었던 다동조합이 빠르게 정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동조합의 극장에서의 성공은 다동조합의 집단적 정체를 ‘여배우’로 이해하도록 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20세기 이후 서울에서 타지역 출신 기생들이 집단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여성의 다양한 공연 종목을 개척하고 창작함으로써 한국근대공연예술사에 크게 기여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음악사회사』(권도희, 민속원, 2012)
「기생의 가창활동을 통한 근대에의 대응」 (권도희,『한국시가연구』32집, 2012)
「20세기 전반기 극장 연희의 종목과 그 특징」(권도희,『한국음악연구』47집, 2010)
「20세기 기생의 가무와 조직」(권도희, 『한국음악연구』45집, 2009)
「20세기 관기와 삼패」(권도희, 『여성문학연구』16집, 2006)
「경성의 화류계」(일기자,『개벽』48호, 1924)
「경성의 요리점과 기생」(풍류생, 『반도시론』1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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