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문으로,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궐(三闕)의 홍예(虹霓)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형식의 중층집으로 우진각지붕을 얹었다.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때 정전(正殿)인 근정전과 편전(便殿)인 사정전·침전인 경성전(慶成殿)·연생전(延生殿)·강녕전(康寧殿) 등을 지어 궁궐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8년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우고,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에 다시 짓게 하였다. 1927년에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경복궁의 여러 곳이 헐리고 총독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이후 광화문은 6·25사변 때 폭격을 맞아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불타버렸다.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해체되었다. 이후 광화문 이전 공사가 개시되어 2010년 8월 완공되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의 세 곳에 홍예문(虹霓門)을 내어 3문형식을 취하였는데, 가운데 칸은 높이 17척 5촌, 너비 18척이고, 양 옆칸은 높이 16척, 너비 14척 5촌씩이다. 포작(包作)은 안 7포, 밖 5포로 출목수로는 안 3출목, 밖 2출목인 다포식을 채택하였다.
1층 기둥높이는 7척이고, 기둥 간격은 앞면은 가운데가 27척, 양옆이 25척씩이고, 옆면은 10척씩이다. 1층의 기둥 사이는 개방하였고, 2층에는 판문을 달아 열고 닫게 하였다.
내부살미는 조선 말기에 흔히 쓰던 운궁(雲宮: 살미 내부의 중첩된 부분)을 사용하였고, 내목도리(內目道里) 아래에 장화반(長花盤: 창방과 장여 사이에 길게 놓인 화반)을 놓았으며 공포 사이에는 포벽을 마련하였다.
가구수법은 아래층 대들보가 고주(高柱)에서 합보 형식을 하고 대들보와 위층 마루 사이에 공간을 두었다. 아래위층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의 각 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들을 배치하였다.
궁궐이라는 말이 궁과 궐의 복합어이며, ‘궐’의 형태는 높다란 석대 위에 2층 누각을 세운 것이 일반적이었음에 비추어,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의 정문(正門)으로서 의의가 있다. 2010년 8월 완공된 광화문은 원래 위치와 모습을 되찾았으며, 최대한 원형대로 보존된 광화문은 조선 말기의 궁궐건축을 대표하는 뛰어난 건물로서 위상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