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처리하기 위하여 쌓은 산이지만,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地氣)를 보태려고 쌓은 산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원수법으로서 가산을 만든 의도는 대자연을 주거환경 안에 편입시켜 소우주를 만들려는 데 있었다. 가산을 조원수법으로 이용한 것은 일찍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대개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이때 나온 흙으로 산을 만들고 여기에서 짐승을 기르거나 화초를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진사왕 7년(391)에 궁실을 크게 수리하면서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기한 짐승을 기르고 아름다운 화초를 심었다는 기록이나,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화초와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 가산을 만들어 원유(苑囿)를 조성하였던 예이다.
고구려의 안학궁(安鶴宮)과 발해의 상경 용천부(龍泉府) 궁성 등에도 가산이 있었으며, 고려 예종 8년(1113)에는 궁궐 남쪽에 화원과 가산을 만들고 여기에 만수정(萬壽亭)을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문신인 성임(成任)의 석가산(石假山)이 알려져 있으며,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峨嵋山),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두 섬, 소쇄원(瀟灑園)과 성락원(城樂園)의 가산 등이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가산을 만든 경우로는 1398년에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예가 있다. 또, 큰 연못이나 하천을 파낼 때 나오는 흙을 처리하기 위해 가산을 만든 경우로는, 청계천을 파낼 때 파낸 흙을 수구문(水口門) 근처 성벽 안쪽에 쌓아 만든 예가 있는데, 그 위치는 당시의 훈련원 북쪽이었다.
가산의 조성은 자연의 경관을 끌어들여 생활주변마저 선경(仙境)으로 만들려고 하였던 도가적(道家的) 자연관(自然觀)의 영향으로 시대가 내려오면서 더욱 일반화되어 사대부의 별서(別墅 : 별장)나 정원을 조성하는 데도 가산에 의한 조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