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에 결성되었던 서울 삼패 출신 기생들의 조직체였던 시곡기생조합은 1915년에 신창조합이 되었고, 1918년 경화권번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더 이상 서울 출신 기생들이 늘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삼패 조직의 세는 전날처럼 확장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한편, 1918년에 다동기생조합은 대정권번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운영방식이 변화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기생들이 대정권번에서 이탈했고 대정권번의 세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정권번에서 이탈한 기생들은 1923년 8월에 하규일을 앞세워 경화권번을 매수하여 조선권번을 설립했다.
조선권번은 1923년 조선 가무의 정통성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기존의 기생조직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기생조직이었다. 1920년대 초부터 서울에서는 기생조직의 이합집산이 거듭되었다. 1910년대 이후 기생조직은 이익집단으로서 경제활동의 단위가 되었으며, 상당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제도로 정착했다. 1920년대가 되면 기생조직을 통한 수익 증대를 목적으로 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기생 조직의 재편과 새로운 조직의 결성 그리고 조직과 조직 간의 이합집산이 본격화되었다. 조선권번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기생조직을 넘어서 새롭게 탄생할 수 있었다. 조선권번의 성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1913년에 결성된 다동기생조합의 쇠락과 삼패 출신 기생조직(1909)의 해체였다.
조선권번은 설립된 지 1년 후 송병준에 의해 매수당했다. 1924년 당시 조선권번의 기생 수는 약 90명 정도였지만, 1937년에는 490명으로 당시 장안의 3대 권번 즉,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다.
조선권번의 설립기부터 번영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명기들이 있었다. 이들이 기예를 완성하고 지속하는데 조력했던 인물은 하규일이었다. 하규일은 당시 절정의 가객으로서 다동기생조합 설립부터 기생의 가무 학습과 공연에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공연물 외에 다양한 공연물을 시도하면서 기생의 극장 공연을 주도했다. 하규일은 다른 권번의 운영자와 달리 경영권의 유지와 장악보다는 기생들의 가무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는데 관여했다. 이 때문에 1920년대에 하규일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조선권번은 조선가무의 개성을 유지하고 계승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권번은 설립 당시 서울 장안의 여타 권번과 달리 신생 권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는 다른 권번을 뛰어 넘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조선권번 기생들은 하규일의 창조적 지도하에 다양한 공연예술종목을 선보임으로써 당시 궁중 가무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던 한성권번보다 세를 키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