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권번은 20세기 이후 기생의 이름으로 조직된 최초의 조합인데, 설립초기에는 기생조합이라고 명명되었고, 세간에서는 광교조합이라고 불렸으며, 1918년에 한성권번으로 개칭되었다. 이 권번은 1947년까지 지속되었다.
20세기 이후 근대적 제도에 의해 여성 공연예술가들이 집단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생의 이름을 정면에 두고 만들어진 집단이 한성 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조선후기로부터 이어지는 여성공연예술계의 전통을 이어받은 집단으로 관기 출신 기생들이 이에 소속해 있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설립 초기의 법적 명칭이었고 안정기 이후 세간에서는 이 집단을 광교기생조합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광교기생조합 시절에도 조선후기의 관례들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 기생들에게는 후원자가 있었는데 광교조합 기생들에게도 후원자가 있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그들을 기부(妓夫)라고 불렀다. 따라서 “기생조합-광교조합-한성권번”으로 이어지는 집단은 20세기 이후 새로운 제도 하에서 기생과 후원자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9월 경시청은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을 발표했고, 이 법을 근거로 1908년 10월 이후 최초의 기생조합이 결성되었다. 초기에는 이 조직을 ‘기생조합’으로 불렀다. 그러나 1909년 창기조합(시동기생조합)이 결성되었고, 또 이후로도 다수의 기생조합이 결성되면서 최초로 결성된 조직을 한성기생조합이라고 불렀다. 한성기생조합의 조합 사무실이 광교에 있었으므로 세간에서는 이를 광교조합이라고도 불렀다. 1910년에 무교정 92번지에 이사했고, 1918년 1월 이후로 한성권번이라고 개칭했다.
과거 관기 출신이었던 기생들이 광교조합에 소속하면서, 구성원들은 조선 후기부터 이어지는 궁중 여악 및 서울의 민간에서 활동했던 기녀의 레퍼토리를 적극적으로 계승했다. 안춘민(安春敏), 엄순모(嚴淳模) 등이 참여하여 합자회사 형식으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이 중 안춘민은 당대 민간 가객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안춘민 외에도 수많은 당대의 가무 명인들이 한성권번에 포진해 있으면서 동기들을 가르치고 기생들의 기예를 심화시켰다. 장계춘이 대표적이다. 장계춘은 당시 궁중 가무의 명인으로 만년까지 한성권번 사범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당시 장계춘은 90여 가지의 궁중 정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원로 예술가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20년대 이후 기생계의 이합집산이 빈번하게 이루어질 때에도, 1930년대 중반 권번들의 통폐합 강제에도 불구하고 한성권번은 굳건히 유지되었다.
한성권번은 기생조합으로 설립될 당시부터 극장에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다. 흥행용 기획공연으로부터 자선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조직 결성 초기에는 궁중 여악의 전형적인 공연종목이었던 정재를 공연함으로써 당시 사회에 여성의 우아미와 세련미를 각인시킨 바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로는 전통 가요 및 당시 유행가 나아가 서양 댄스 등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1930년대 중반 이후로는 조선권번에 비해 조선가무로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지만, 결성 이후 1947년까지 단 한 번도 해체되거나 와해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연활동을 전개했던 유일한 기생조직이었다.
최초의 기생조합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인에 의해 경영되면서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던 유일한 기생집단이었다. 궁중가무를 장기로 내세워 조직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한편 다양한 공연물을 수용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기생조직으로 수십 년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