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송 관현악단 ( )

국악
단체
경성방송국에 소속된 관현악단.
이칭
이칭
JODK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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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성방송국에 소속된 관현악단.
개설

1927년 2월 16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고 호출 부호 JODK로 본방송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약 1년 후인 1928년 4월 13일에 JODK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었다. 지휘자는 상임이 아니었고 초기 구성원은 박경호와 홍난파 등을 비롯해 18명이었다. 월 두 세 차례 방송했다. 한편 이 악단과 별도로 1938년에 홍난파 주도 하에 같은 이름의 오케스트라. 즉 JODK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었는데, 이 악단은 서양 고전음악을 연주했다. 즉 경성방송국에는 유행가 반주를 맡은 관현악단과 유럽고전음악을 연주하던 관현악단 두 종류가 있었다.

연원 및 변천

경성방송국에 재직했던 이혜구에 의하면, 처음 결성된 JODK 오케스트라는 당시 세태의 필요에 따라 유행가를 반주했고, 두 번째 JODK 오케스트라의 경우는 방송협회장의 적극적 후원 하에 서양의 고전음악을 연주했다. 현재 JODK 오케스트라는 후자가 유명한데, 그 이유는 현재 KBS관현악단의 모태로 이해되기 때문이고, 상대적으로 관련 자료가 많이 때문이다.

두 번째 JODK 관현악단에 대한 증언과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결성 시점은 1935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제2대 방송협회장 하시 모리사다(土師盛貞)의 취임(1938) 이후라고 한다. 홍난파의 자필이력서에도 1938년 11월에 지휘자로 취임했다고 되어 있다. 홍난파는 JOCK 오케스트라의 구성원 수를 25명 정도로 늘렸고 악기를 수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혜구의 『만당음악편력』에 의하면, “오케스트라는 1관 편성이었다. 플룻에 정사인(鄭士仁, 전 이왕직 군악대원), 오보에에 이병호(李炳祜, 전 국립국악원 피리 잽이), 트럼펫에 김종대(金鍾大, 유행가 반주자), 더블베이스 베이스에 윤기항(尹基恒)이었다. 오보에와 파곳은 새로 구입하였다. (혼은 빠진 것 같다). 팀파니에 이찬종(李燦鍾, 연전 관현악단원)이었다. 바이올린에 최호영(崔虎永, 중앙악우회 관현단 악장)과 김생려(金生麗, 1939년 봄에 악장직을 맡았고 홍난파 밑에서 편곡 및 사보를 하였다), 비올라에 안성교(安聖敎), 첼로에 김태준(金泰淵)이었다. 관현단원의 월급은 없었고, 방송을 할 때마다 수당을 주었다.” 이 악단은 유럽 고전 음악 연주에 정진했다. 홍난파의 사후(1941) 1944년에 김생려가 촉탁으로 홍난파를 대신했지만,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JODK 오케스트라는 유명무실해졌다.

의의와 평가

경성방송관현악단은 한국 최초의 직업 관현악단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단, 경성방송관현악단은 단일한 단체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JODK관현악단으로 불린 두 개의 악단, 즉 늦어도 1938년 이전에 결성되었던 상임지휘자가 없는 유행가 반주 관현악단과 홍난파가 상임지휘로 있었던 관현악단으로 구별된다.

참고문헌

『만당음악편력』(이혜구, 민속원, 2007)
『새로 쓴 홍영후 연보』(민경찬,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민족문제연구소, 2006)
『한국근대음악사연구』 (송방송, 민속원, 2003)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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