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은 국가 의례나 궁중의 연회에서 여악을 담당한 전문 예술가로 활동한 여성들을 말한다. 전근대시대에 기생의 성 접대는 공식적인 업무가 아니었지만, 활동 전반에 성 접대가 매개되어 있었다. 근대사회에 들어 조선총독부는 성매매를 겸하면서 유흥업을 하는 여성으로 기생을 규정하여 이들을 등록하고 관리하였다. 기생들은 사회의 선량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혐오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민족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성매매와 유흥을 기생과 연결시키는 인식은 현대사회에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시대 기생은 대부분 모계로부터 세습되었으며 관노비의 신분이었다. 반역자의 부녀자라서 기생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8도의 감영, 각 도의 군‧현 등 특정 관아에서 최하급의 관속(官屬)으로 관노비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작성된 ‘관노비안(官奴婢案)’에 등록되어 관리되었다. 흔히 기생 명부로 알려져 있는 기적(妓籍)은 관노비안의 기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한양에도 관기(官妓)가 있었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한양의 기생을 폐지하고 필요할 경우 지방 관아에서 차출하였으며 이들을 경기(京妓)라 불렀다. 차출된 기생을 관리하는 기관은 장악원(掌樂院)이었다. 경기는 임무가 끝나면 지방의 소속 관아로 돌아갔다.
기생은 관노비이므로 지방 관아 산하의 관노청에 소속되었으며, 그 아래 교방청 혹은 기생청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합쳐 교방이라고도 한다. 교방은 기생 교육을 담당한 곳으로 지방 관청 각 부서의 관리를 받았다. 일상적 업무나 여악은 호방(戶房)이 담당하였고, 급여나 수당 등은 예방(禮房)에서 관리하였다. 이들은 사적으로 기방을 통하여 경제 활동을 하였다.
기생의 공식적인 역할에는 남성에 대한 성 접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들의 활동 전반에는 섹슈얼리티가 매개되어 있었다. 성 접대가 공식 업무는 아니었다고 해도, 기생의 업무에는 남성에 대한 성적 접대가 관행적으로 개입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신분제의 변화가 생겼고, 1897년부터 지방 관기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 기생은 관노비라는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기생단속령」과 「예기작부예기치옥취체규칙(藝妓酌婦藝妓置屋營業取締規則)」(1916년, 경무총감부령 제3호)에 의하여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 1908년 「기생단속령」이 제정되면서 관기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단속령 공포로 인하여 관기의 관할 관청이 장악원에서 경무청으로 바뀌었다. 이는 기생이 예술가가 아닌 단속 대상자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기생단속령」에 의하면 기생들은 기생 조합에 가입하여 영업 허가를 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 기생 조합은 1914년 이후 일본식의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바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폐지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기생들은 또한 「예기작부예기치옥취체규칙」에 의하여 규제를 받았다. ‘예기’란 조선의 ‘기생’과 일본의 ‘예기’를 통칭한 범주로 요릿집에서 춤과 노래로 손님의 흥을 돋우는 이들을 말한다. 이 법령에는 기생의 성매매를 우회적으로 금지하고 성병 검진을 강제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기생을 사실상 성매매 여성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병 검진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총독부가 도입한 ‘ 공창제’는 허가를 받은 업자와 성매매가 허용된 여성에 한정하여 성매매를 합법화하고, 성매매 여성을 등록하여 정기적으로 성병을 검진하도록 하였다. 기생의 경우 성매매는 금지되었지만 기생 조합에 소속되어 정기적인 검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즉 기생은 등록과 검진을 중심으로 한 성 관리 제도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개화기 이래 기생은 사치와 유흥의 상징으로, 선량한 사회의 풍속에 해악을 끼치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 사회에서 기생들은 노비의 역할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기생 노릇을 계속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기생 조합과 권번은 일종의 기생 양성소를 두어 전통 여악뿐 아니라 서양의 사교춤, 일본의 민요 등을 가르쳤으며 요리점의 요청이 있을 때 기생을 보내 중간 이익을 얻었다. 전통 여악은 이러한 형식을 통하여 상업화, 민간화 되었다. 기생들은 기생 조합과 권번을 통해 공연하면서 대중 예술인으로 사회에 진출하였으며, 실제로 일제시기 대중 예술계에는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 가수들이 많았다. 또 한시(漢詩)를 창작하며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기생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은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기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을 벌였다. 특히 3·1운동 때 기생들은 경기도 수원이나 안성, 황해도 해주, 경상남도 진주나 통영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원 예기 조합의 김향화, 황해도 해주의 기생 김월희, 문월선, 이벽도, 문향희, 해중월, 경남 통용 기생단의 정막래, 이소선 등이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문자 교육을 받고 경제적으로 능력을 갖추었으며, 춤과 노래라는 재능을 겸비한 기생들은 사회 운동이나 민족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고아원, 학교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하여 사회단체들이 개최한 행사에 참여하여 예술 공연으로 기여하고, 각종 사회사업에 기부금도 냈다. 그 외에도 수해 · 기근으로 이재민이 된 동포를 돕는 행사나, ‘재만 동포’ 구제 사업에 예술 공연을 하는 등 사회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정칠성과 같은 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기생은 외화 획득에 주요한 목적을 둔 관광 산업에서 ‘기생 관광’ 또는 ‘관광 기생’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