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악 ()

헌선도
헌선도
무용
개념
서울과 외방의 국가기관에서 신역으로 악가무를 하는 여자 악인 또는 그들이 공연하는 악가무. 여공인 · 여령 · 기악 · 여기 · 기생 · 기 · 창기 · 관기.
이칭
이칭
여공인(女工人), 여령(女伶), 기악(妓樂), 여기(女妓), 기생(妓生), 기(妓), 창기(娼妓, 倡妓), 관기(官妓)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여악은 국가기관에서 악가무를 하는 여자 악인 또는 그들이 공연하는 악가무이다. 관에 소속된 종으로 50세까지 국가의 연향에서 정재 혹은 악기 연주·노래 등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무척’, ‘가척’으로 불렸는데 문헌상 여악 제도가 드러난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조선 전기에 여악은 창기·여공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서울뿐만 아니라 외방에도 두었다. 조선 후기에 여악은, 장악원에 소속시켜 서울에 상주하던 조선 전기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 유학 이념의 조선왕조에서 여악은 논란이 있었지만 궁중의 공연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측면이 있다.

정의
서울과 외방의 국가기관에서 신역으로 악가무를 하는 여자 악인 또는 그들이 공연하는 악가무. 여공인 · 여령 · 기악 · 여기 · 기생 · 기 · 창기 · 관기.
개설

신분은 공천(公賤)으로, 50세까지 국가의 크고 작은 연향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공연의 주요 내용은 정재였고, 악기 연주 및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 의장(儀仗)을 들고 시위(侍衛)를 담당했다.

연원 및 변천

등장은 궁중무용의 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왕권정치의 본격적인 틀이 잡힌 삼국시대부터 전문 양성기관과 함께 국가적 행사의 의식 또는 경축 등 연중행사의 연행을 담당하면서 발전했다. 삼국시대의 여악은 무척(舞尺) · 가척(歌尺)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고구려의 고분인 통구 무용총(舞踊塚)에 여인들의 춤추는 벽화가 있으므로, 여악의 제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1. 고려시대

문헌상으로 여악제도가 드러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여기(女妓)를 하악(下樂)이라고 하여 3등급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임금이 상용(常用)하는 대악사(大樂司)에 260명, 관현방(管絃坊)에 170명, 경시사(京市司)에 300여 명의 여기가 소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특히 문종 때 송나라로부터 교방악(敎坊樂)이 수입되어, 1073년(문종 27) 2월에는 연등회에서 교방여제자 진경(眞卿) 등 13명이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행하였고, 같은 해 팔관회에서 교방여제자 초영(楚英) 등이 포구락(抛毬樂)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1077년에는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를 선보였다.

2.조선 전기

조선시대에 여악은 창기(娼妓, 倡妓) · 여기 · 관기(官妓) · 기악(妓樂) · 기생(妓生) · 여령(女伶) · 여공인(女工人) · 기(妓)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창기 · 여기 · 관기 등이 여악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은 이들이 바로 여악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여악의 신분은 공천으로 50세가 되어야 기역(妓役)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들의 자손은 여기나 악공 또는 무동이 되어 그 업을 세습하였다. 기예가 뛰어난 여악은 종친이나 재상의 이 되더라도 기역을 완전히 면제받지 못하고 내연(內宴)에는 참여해야 했다. 그만큼 악가무의 예능은 쉽게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없는 전문분야였다. 그러나 공연을 마친 뒤 포상으로 천인 신분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경기(京妓)의 정원은 세종대에는 100명 남짓이었으나, 1485년(성종 16)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여기 150인, 연화대 10인, 여의(女醫) 70인을 3년마다 여러 읍의 연소한 비자(婢子)에서 뽑아 올린다”라고 했으니, 세종대보다는 규모가 확대되었다. 국상을 당하거나 극심한 흉년을 맞으면 공연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므로, 여기가 원하면, 다시 고향에 내려 보내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악은 서울뿐 아니라 외방에도 두었다. 외방에는 중국사신과 왜사(倭使)를 접대하기 위해 그들이 경유하는 고을과 군사 위로 및 야인 회유를 위해 변진(邊鎭)이 있는 고을에 여기를 두었는데, 큰 고을에서는 여기의 수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기는 대개 외방 여기 중 재예가 뛰어나 뽑혀온 자들이었다. 경기는 악공과 마찬가지로 태평관 근처에 거주하며, 관습도감(뒤에 장악원으로 흡수됨)에서 악가무를 익혔다. 나라에서는 봉족(奉足)을 대주어 생활을 도왔다.

조선 전기에 여악의 교육은 여름과 겨울의 6개월을 제하고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과 8월에서 10월까지 3개월 동안 윤일제(輪日制)로 시행되었다. 전공 과목은 거문고 · 가야금 · 향비파(鄕琵琶) · 장구 · 아쟁 · 해금 · 피리 · 대금 · 소금 등이었고, 전공 악기에 능숙한 사람은 다른 악기를 하나씩 더 배우게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공 악기 한 가지만 연마하게 하였다.

가곡과 당비파는 필수적으로 이수하도록 하였다. 각 전공에 따라 교사가 배치되고, 다 가르친 다음에는 제조(提調)가 직접 그 기예 정도를 시험하여 서투른 사람은 벌을 주고, 더 심하게 못하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본역을 하도록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태만히 한 교사를 벌하기도 했다. 이들을 교육시키는 선생은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이었다.

1744년(영조 20) 『진연의궤(進宴儀軌)』에 따르면, 강원도 ·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 평안도 · 황해도에서 뽑혀 올라온 52명의 기생을 전악 등 8명의 선생이 가르쳤다. 이들이 가르친 내용은 노래와 장고 · 방향 · 현금 · 교방고 등의 악기연주, 처용무 등으로 악가무를 망라하였다. 진연 때의 공연 연습에 임해서는, 기생들이 질병에 걸릴 것을 대비하여 구료관(求療官)이 약물을 가지고 매일 대령하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여악의 활동을 살펴보면, 회례연 · 양로연 · 사신연과 같은 공식적인 연향, 왕실의 소소한 연향, 변방지역에서의 야인회유와 군사를 위로하는 연향, 중궁 하례와 친잠례에서 악가무를 했고, 노상에서 대가(大駕)를 환영할 때 교방가요를 올렸다.

이외에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치하하고 연로한 신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연향을 베풀어주거나 과거급제자와 그 부모를 영화롭게 해주고자 할 때, 신하가 부모를 위해 헌수연(獻壽宴)을 베풀 때, 악공과 함께 여악을 내려주었다. 특히 내연과 중궁하례 및 친잠례에서는 여악이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여악 고유의 기능이다.

  1.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여악제도에 변화가 생겼다. 외방에서 재예가 뛰어난 여기를 뽑아서 장악원에 소속시키고 서울에서 상주하며 악가무 활동을 하게 한 조선 전기와 달리, 인조반정(1623) 이후에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 여기를 두지 않았다. 이를 반영하여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진연 때에, 여기 52명을 선상한다. 특별한 지시가 있으면 가감한다.”라고 하였다. 즉, 풍기문란을 막기 위해 내연을 앞두고 임시로 외방여기를 뽑아올려 썼으며, 연향을 마치면 곧 외방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선상기는 평안도와 경상도 감영에서 가장 많이 선발되었다. 선상기의 선발과정은 중앙에서 지방 감영에 공문을 보내면, 감영에서 다시 해당 읍으로 공문을 보내고, 각 읍에서 수향리의 책임 아래 여악을 뽑았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 장악원 여기가 상주하지 않으므로 여악의 역할이 조선 전기에 비해 많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악의 역할은 주로 내연에서 악가무를 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외방 여기는 조선 전기처럼 사신이 경유하는 고을에서 베푸는 연향, 변방군사 위로연, 지방 관아 연향 등에서 악가무를 했을 것이다. 또한 18세기 후반부터는 궁중 연향에서 선상된 외방 여기와 함께 의녀와 침선비(針線婢)도 정재 공연에 참여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여악의 폐단은 줄기차게 지적되었으나, 대한제국기까지 여악제도는 유지되었다. 여악의 폐단은 궁중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성상의 마음과 눈이 방탕해지는 점, 여기와 관비는 모두 공천에서 선발하므로 여기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관비의 수가 적어져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점, 여기의 화려한 치장이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점, 여기 소생 자식의 아버지를 가리는 문제가 때때로 발생할 정도로 풍기가 문란해지는 점 등인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풍기문란이었다. 따라서 성리학적 문물제도를 정비해가는 세종대 이후 관원들의 여기 간통과 사사로운 유흥을 위해 역(役)을 수행하는 여기를 불러내는 일 등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려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내용

춤과 노래는 남자 악인들이 따를 수 없는 여악의 장기였고, 고려와 조선 모두에서 정재의 춤과 노래는 여악에 의해 연행되었으므로, 정재의 전승은 여악에 힘입은 바가 크다. 조선시대 내연에서 여악이 악기연주도 했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악공이 악기연주를 담당했으므로, 여악의 주요한 활동은 정재 공연이었다. 여악이 궁중에서 정재를 공연하기까지의 선발과정 및 연습과 공연, 공연을 마친 뒤의 포상 등에 관해서는 『진찬의궤』 · 『진연의궤』에 그림과 함께 자세히 기록되었다. 여악이 궁중에서 공연한 정재는 『고려사』 「악지(樂志)」와 『악학궤범(樂學軌範)』『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자세히 전한다. 외방에서 공연한 정재 절차는 정현석(鄭顯奭)『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한다.

의의와 평가

유학 이념에 의해 건국된 조선왕조의 여악 문제는 건국 초기부터 많은 논란꺼리였으나, 여악은 대한제국기까지 궁중행사의 공연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여악은 크고 작은 연향에서 악가무를 함으로써 분위기를 화락하게 하여, 군신민 사이의 화합, 왕실 친인척간의 화목, 부모 자식간의 친애, 변방군사 위로, 사대교린에 일조했다. 또한 중궁에게 올리는 하례와 중궁이 주관하는 친잠례에서 음악연주를 하여, 엄숙한 의식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여악이 공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후기에는 외연에서 남악이 정재를 공연하는 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남악 또한 여악 못지않게 정재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악학궤범(樂學軌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진연의궤(進宴儀軌)』(1744, 영조 갑자년)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김종수, 민속원, 2003)
『한국음악사』(장사훈, 정음사, 1976)
『조선음악소사』(성화진, 민학사, 1975)
『여명의 동서음악』(장사훈, 보진재, 1974)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조경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