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여령이나 무동이, 지방 관아에서 기녀들이 공연했던 악가무의 종합예술이다. 춤뿐만 아니라 재예를 드린다는 의미였는데 차츰 궁중무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 정재라는 용어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쓰였다. 정재는 지방 관아에서도 공연되었지만 주로 공연되는 곳은 궁중 안의 연향이었다. 조선 전기까지 당악정재와 향악정재가 구분되었으나 후기에는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고려 이후 조선 말기까지 전승된 정재에는 50여 종목이 있다. 1950년대부터 궁중 정재의 재현 작업이 이루어져 대부분의 정재가 현재 재현되었다.
정재라는 용어의 첫 번째 뜻은 ‘재주를 보인다’는 광의의 의미로 쓰였다. 『석보상절(釋譜詳節)』(1447)에 “정재는 재주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니, 놀이하여 남에게 보이는 것을 정재라 한다”라는 용례가 있다. 두 번째 뜻은 헌기(獻技), 즉 춤뿐만 아니라 모든 재예(才藝)를 드린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차츰 궁중무의 대명사처럼 사용하였다.
정재인이라 했을 때는 정재를 공연하는 여악이나 무동이 아닌, 재인(才人)의 의미로 쓰였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중 “동방의 풍속에, 광대로서 나이 젊고 곤두박질을 잘하는 자를 ‘정재인’이라 하였다”라고 했다. 또한 『지봉유설(芝峯類說)』 잡기조에 “우리나라 정재인은 본래 중국의 배우(俳優) · 환술자(幻術者)의 부류였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말에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올 때 따라왔다고 한다.”라고 하여 ‘정재인’이라고 했을 경우에는 주로 재인을 지칭했다.
조선 후기의 연향 의궤에서는 가자(歌者)와 금슬(琴瑟)의 가곡 공연을 정재라 했다. 『조선아악(朝鮮雅樂)』에 따르면, 1913년 9월 8일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에서 거행된 고종의 62세 생신 축하연에서 정재를 ‘여흥(餘興)’으로 부르기도 했다.
정재의 동작진행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문헌은 『고려사』 권71의 악지(樂志)인데, ‘ 당악(唐樂)’과 ‘ 속악(俗樂)’ 항목에 악기와 춤과 노래가 함께 수록되었다. 이때는 정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의 정재종목이 『악학궤범(樂學軌範)』 권3에 수록되었을 때는 ‘고려사악지 당악정재(唐樂呈才)’, ‘고려사악지 향악(鄕樂)정재(鄕樂)’라고 하여 ‘정재’로 명시되었다.
고려시대에 정재라는 용어가 이미 쓰이고 있음은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집』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실록』 1395년(태조 4) 10월 5일에 처음 정재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향유되었다. 주로 공연되는 곳은 진연(進宴) · 진작(進爵) · 진찬(進饌) · 사신연(使臣宴) · 기로연(耆老宴) · 양로연(養老宴) 같은 궁중 안의 연향이었다. 양로연 같은 경우는 궁중 안의 연향이라도 연로한 일반인이 참여하여 정재공연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궁중 밖 지방 관아에서 정재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으나, 궁중정재의 일부 종목이 제주에서부터 함경도에 이르는 전국 관아에서 향유되었다.
제주 기녀가 무고(舞鼓)를 추는 모습이 1703년 이형상에 의해 제작된 『탐라순력도첩(耽羅巡歷圖帖)』에 전하며, 함경도 기녀 가련(可憐)이 「검무(劍舞)」를 춘 기록이 이옥(李鈺, 1760∼1812)의 『석호별고(石浩別稿)』 북관기야곡론(北關妓夜哭論)에 보인다. 임금이 신하에게 개별적으로 내려주는 사악(賜樂)에서도 공연되었다.
지방 관아에서도 활발히 공연되었지만, 주요 무대는 궁중연향이었다. 궁중연향은 의례의 범주에 포함되었으며, 교화정치의 한 일환으로 행해졌다. 연향은 사회구성원간의 유대를 돈독히 해주는 기능을 했고, 순수하게 예술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극장식 무대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연향은 정재가 공연되는 주요한 문화공간이었다. 임금은 연향에서 공연될 정재종목을 선정하였으며, 연습과정도 지켜보는 등 정재 공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근대에도 정재 전통은 지속되었다. 1918년에 발간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정재 48종목을 특기로 한 대정권번의 주학선(朱鶴仙)을 비롯하여 정재를 특기로 한 기생이 많았으니, 권번(券番)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정재가 활발히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통에 따라 송나라 교방악 계통의 당악정재와 우리나라에서 전래하던 향악정재로 구분된다. 조선 전기까지는 이러한 구분이 명확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고려 이후 조선 말기까지 전승된 오십 여 정재는 다음과 같다.
① 당악정재:『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정재는 「헌선도(獻仙桃)」 · 「수연장(壽延長)」 · 「오양선(五羊仙)」 · 「포구락(抛毬樂)」 · 「연화대(蓮花臺)」 등 5종목이다. 이 5종목은 중국 송(宋)의 대곡(大曲)에 해당하며, 그 내용은 모두 군왕을 축수(祝壽) 것이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조선 초기의 당악정재는 「금척(金尺, 夢金尺)」 · 「수보록(受寶籙)」 · 「근천정(覲天庭)」 · 「수명명(受明命)」 · 「하황은(荷皇恩)」 · 「하성명(賀聖明)」 · 「성택(聖澤)」 · 「육화대(六花隊)」 · 「곡파(曲破)」 등 9종목이다.
② 향악정재:『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향악정재는 「무고(舞鼓)」 · 「동동(動動), 뒤에 아박(牙拍)」 · 「무애(無㝵)」 등 3종목이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조선 초기의 향악정재는 「보태평(保太平)」 · 「정대업(定大業)」 · 「봉래의(鳳來儀)」 · 「향발(響鈸)」 · 「학무(鶴舞)」 ·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 「교방가요(敎坊歌謠)」 · 「문덕곡(文德曲)」 등 9종목이다.
조선 전기까지의 문헌 기록에서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명시될 정도로 분명했으나, 조선 후기에 창작된 정재에서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구분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형식적으로도 크게 변별점이 없었다. 조선 후기의 정재 관련 기록은 『진작의궤』 · 『진찬의궤』 · 『진연의궤』를 비롯하여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자세히 전한다.
조선 후기 순조 이전에 창작된 정재는 「광수무(廣袖舞)」 · 「검기무(劍器舞)」 · 「선유락(船遊樂)」 · 「초무(初舞)」 · 「첨수무(尖袖舞)」 등 5종목이다. 그 중 검기무와 선유락은 지방에서 먼저 활발히 공연을 펼치다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에는 23종목의 새로운 정재가 등장했으며, 그 중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17종목의 정재 창사(唱詞)를 지었다.
효명세자가 창사를 지은 정재는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 「경풍도(慶豊圖)」 · 「만수무(萬壽舞)」 · 「망선문(望仙門)」 · 「무산향(舞山香)」 · 「박접무(撲蝶舞)」 · 「보상무(寶相舞)」 · 「사선무(四仙舞)」 ·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 「영지무(影池舞)」 ·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 「제수창(帝壽昌)」 · 「첩승무(疊勝舞)」 · 「춘대옥촉(春臺玉燭)」 · 「춘앵전(春鶯囀)」 · 「최화무(催花舞)」 · 「헌천화(獻天花)」 등이다.
효명세자가 창사를 짓지는 않았으나, 순조대에 창작된 향악정재로는 「고구려무(高句麗舞)」 · 「공막무(公莫舞)」 · 「연화무(蓮花舞)」 · 「춘광호(春光好)」 · 「침향춘(沈香春)」 · 「향령무(響鈴舞)」가 있다. 헌종대에는 「관동무(關東舞)」가 지방에서 궁중으로 유입되었고, 고종대에는 선천의 항장무(項莊舞)와 성천의 사자무(獅子舞)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서울의 상층문화가 일방적으로 지방관아의 교방쪽으로 흘러내려간 것만은 아니고, 특정 지역의 교방춤이 궁중으로 소개되는 문화의 역류 현상도 조선후기에 일어났다.
조선 후기의 각종 읍지(邑誌)에 따르면, 전국의 교방에서 교습하고 연행했던 정재의 종류는 「무고」 · 「포구락」 · 「선유락」 · 「향발무」 · 「검무」 · 「처용무」 · 「아박무」였다. 진주교방에서는 춤진행 과정은 『교방가요』를 통해 알 수 있고 「항장무」 · 「연화대」 · 「육화대」 춤진행 과정도 『교방가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궁중보다 춤절차와 무대도구 및 의상이 간소하다.
특징은 형식미를 갖추고, 정적이고 내재적인 율동미에 치중하며 대형중심의 절제된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점과, 민속무용과는 달리 화려한 의상과 위의(威儀)를 갖추기 위한 갖가지 의장(儀仗)을 사용하는 점이다.
무동 출신인 김천흥을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궁중 정재의 재현 작업이 이루어져, 대부분의 정재가 현재 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