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선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선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군.
정의
평안북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정주군 · 구성군, 서쪽은 철산군, 남쪽은 황해, 북쪽은 구성군 · 의주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4°42′∼125°02′, 북위 39°15′∼39°57′에 위치하며, 면적 672.88㎢, 인구 9만 5172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8개 면 75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선천읍 창동이다.

자연환경

북부와 동부는 강남산맥의 여맥이 뻗어 내려 대목산(大睦山, 349m) · 문수산(文秀山, 741m) 등이 솟았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평야지대이다.

평야 곳곳에는 마성산(摩星山, 262m) · 좌이산(左耳山, 383m) · 대원산(大圓山, 203m) 등의 잔구가 솟아 있다. 중앙에는 검산(劍山, 345m)이 있으며, 향산령(香山嶺) · 내산(內山)에서 발원한 청강(淸江)이 황해로 흐른다.

하천은 대개 북부 산지에서 발원해 황해로 들어가는데, 남동쪽의 동래강(東萊江)은 정주군(定州郡)과의 경계를 흐르면서 유역에 정주평야를 형성하고, 북서부의 동림천(東林川)은 용천평야(龍川平野)를 형성하는데 모두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이다.

해안은 침강에 의한 리아스식해안이 발달하였고, 앞바다에는 신미도(身彌島) · 지도(芝島) · 삼월도(三月島) · 홍건도(洪建島) 등이 흩어져 있다. 그러나 해안일대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대륙붕이 발달했으며 수심이 얕아 큰 배가 닿기에는 부적합하다.

기후는 해양에 접해 있어 그 영향을 받지만 대륙에서 서북계절풍이 강하게 불어와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7.2℃, 1월 평균기온 -9.5℃, 8월 평균기온 24.8℃이며, 연강수량은 1,167㎜이다. 해안선 일대의 일조율(日照率)은 60% 이상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이 군뿐 아니라 평안북도에서는 발굴된 적이 없으므로,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중강군 · 의주군 · 용천군 · 정주군 · 영변군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는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시대에는 스키토 · 시베리아의 북방문화권과 중국의 한족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만주와 한반도지역에 동방문화권을 형성하고, 특히 『사기』 · 『삼국지』 · 『후한서』 ·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동이(東夷)나 한(韓) · 예맥(濊貊)의 사실을 고찰해 볼 때, 고조선시대에 최초로 형성된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 설치와 고구려 · 발해 건국에 이르기까지 이 군은 민족이동과 문화이동의 길목에 위치해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이 군은 고구려시대에 안화군(安化郡)으로 불리면서 역사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평양 천도 후 이 지역은 발해만을 통한 대외교역로의 중심이었으며, 평양과 요동(遼東)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677년(신라 문무왕 17) 평양도호부를 요양(遼陽)으로 이동하고 신라는 대동강 이남을 영유했으므로, 이 군을 포함한 인근지역에는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이 할거하게 되었다. 발해 전성시대에는 압록부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 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이곳을 북진기지로 삼아 북으로 안북부(安北府:지금의 安州) · 통덕진(通德鎭:지금의 肅川) · 안융진(安戎鎭:지금의 順安) 등 많은 진을 설치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뒤 993년(성종 12)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徐熙)의 활약으로 강동6주(江東六州), 즉 흥화진(興化鎭) · 용주(龍州) · 철주(鐵州) · 통주(通州) · 구주(龜州) · 곽주(郭州)를 수복했는데, 통주가 바로 지금의 선천군이다. 당시 통주의 치소(治所)는 동림성(東林城)이었다.

1020년(현종 11) 통주는 다시 선주(宣州)로 고쳐져 방어사가 파견되었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최우(崔瑀)가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항전을 결의했을 때, 선주는 자연도(紫燕島:지금의 永宗島)에 옮겨가 있다가, 1261년(원종 2) 출륙하게 되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선천군으로 되었으며 관원은 군수와 훈도 각 1명이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호수는 528호, 인구는 4,417명이었다. 1563년(명종 18) 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음에 다시 군으로, 1623년(인조 1)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에 몽진할 때 이곳에 행재소(行在所)를 정해 하루 동안 머물렀으며, 왕이 임반역(林畔驛)에서 처음으로 명나라 장수를 인견했다는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선천군은 9면 63리로 되어 있었으며, 호수는 9,314호, 인구는 3만 1213명이었다. 1811년(순조 11) 가산(嘉山)을 거점으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선천군도 함락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뒤 이곳 수령이 항복했다고 해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근 대]

1895년 갑오개혁으로 부 · 군제를 실시하게 되자 선천은 군으로서 의주부(義州府)에 속했으며, 1896년 전국을 13도 1목 15부 337군으로 개편할 때 평안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7년 5월 당시 10면으로 호수 8,124호, 인구 3만 2268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곽산군이 폐지되어 그 일부가 선천군에 편입됨에 따라 1면이 증가해 11면이 되었다.

3·1운동 때 선천군에서도 기독교도 · 천도교도 · 학생 · 농민 · 노동자 · 상인 등이 대거 참가해 치열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일에 신성학교 · 보성여학교가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는데, 일본군 수비대의 발포로 학생 강신혁(姜信赫)이 흉탄에 맞아 죽고 학생 여러 명이 총상을 입었다.

3·1운동 중 전국에서 가장 먼저 희생자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3월 3일에는 기독교 ·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3월 4일에는 읍내 장날을 이용해 군내 각 면에서 농민 · 노동자 · 상인 약 1만 명이 모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일경의 발포로 많은 살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군은 일찍부터 기독교 · 천도교 등 종교가 발달해 신문명을 받아들였으며, 진취기상이 강하고 애국자 · 선각자를 많이 배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온상지가 되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천 출신 인사로는 ‘105인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양준명(梁濬明) 등 18명이 있으며, 그 중 김근형(金根瀅)은 심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또 3·1운동 민족대표 중에는 양전백(梁甸伯) · 길선주(吉善宙) 두 사람이 있다.

1920년 8월에 일본의 중국침략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의회조사단이 중국에 왔다가 일부 의원이 우리 나라에 온 일이 있는데, 그들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보여주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파견된 광복군총영결사대(光復軍總營決死隊) 임용일(林龍日) · 이학필(李學弼) 등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9월 1일).

이 사건에 관련된 신성중학생 박치의(朴治毅)는 사형, 신부면의 김성호(金聖灝)는 15년형을 받았으며, 이 밖에도 많은 인사가 실형을 받았다.

또 1920년 2월 친일 악질분자인 태산면장 김병준(金炳駿)을 총살집행한 박인항(朴仁恒)과 박규명(朴奎明), 1920년 3월경부터 대한청년결사대(大韓靑年決死隊)와 그 후신인 대한보광단(大韓普光團)에 가담해 군자금 모집 등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붙잡혀 옥사한 김도원(金道源) 등이 있고, 광주학생의거 때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가 경찰과 충돌까지 일으킨 사건의 주모자 고두열(高斗悅) 등 많은 학생이 퇴학당하였다.

1937년 7월에는 수양동지회사건(修養同志會事件)으로 백영엽(白永燁) 등 많은 인사가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태평양전쟁 중 첩보활동으로 큰 공로를 세우고 순국한 김정균(金貞均) 등 선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일일이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유물 · 유적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용연면 성적동의 좌이산 기슭에 3기의 선돌이 있으며, 그 밖에도 군내 각처에 선돌이 많이 산재해 있다. 한편,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통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 요지마다 산성 등의 성채가 많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림산성(東林山城)이다. 993년 거란의 침입을 맞아 서희가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물리치고 강동6주를 수복한 다음, 여진족을 몰아내기 위해 쌓은 이 성은 통주성(通州城)이라고도 한다. 둘레 약 5.4㎞, 높이 5m이며 의주로 통하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거란의 2차 침입,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군이 청강의 합수목에서 거란군을 맞아 싸울 때,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그 중 하나를 통주성 아래에 주둔시켰다고 하는데, 그 곳을 지금도 고군영동(古軍營洞)이라 부른다.

군산면 고부동에도 성이 있는데, 1429년(세종 11) 군의 이름을 지금의 선천으로 고치고, 치소를 고부면 백록동(白鹿洞:지금의 고부동)으로 옮긴 다음 쌓은 성이다. 또 정묘 ·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쌓은 검산성이 있는데, 1627년(인조 5)에 선천부사 맹효남(孟孝男)이 축성을 시작했으며, 정묘호란 후에 완성되었다. 일설에는 임경업(林慶業)과 이준(李浚)이 외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둘레는 2㎞에 이른다.

동림성 서북쪽 경의국도가 관통하는 어귀에 있는 좌현관이라는 관문을 끼고 좌현성(左峴城)이 있다. 1769년(영조 45)에 선천부사 이응혁(李應赫)이 쌓았으며, 둘레는 약 1㎞이다. 현재는 경의선이 성벽 위를 통과한다. 이 밖에 해안일대의 산에 봉수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사찰로는 용연면 신풍동에 보록사(寶錄寺)가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게 되면서, 원래 보광사이던 절 이름을 보록사로 고쳤다고 한다. 비석으로는 명나라의 후금(後金) 정벌에 참전해 심하(深河)에서 전사한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요동백비(遼東伯碑)가 있다.

그 밖에 사당 · 사우로 1010년(헌종 1) 거란이 침입했을 때 전사한 흥화진별장 양규(楊規),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淑興) · 유백부(廇伯符)를 제향한 삼충사(三忠祠)를 비롯해 김만중(金萬重)을 배향한 서포사(西浦祠), 김응하와 정기남(鄭奇男)을 배향한 의열사(義烈祠) 등이 있다. 그 중 의열사는 건물이 현존하지 않으며, 김응하충렬비만 남아 있다.

교육 · 문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향교가 성 안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의 향교는 치소가 임반역(林畔驛:지금의 선천읍)으로 바뀐 다음 옮긴 것이다.

또한 1582년(선조 15) 군산면 고부동에 사교서원이 세워졌고, 1711년(숙종 37)에는 주문공서원(朱文公書院)이 건립되었는데 이 서원은 선천의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서당과 재숙으로는 전처형의 동천당서숙(東川堂書塾)을 비롯해 산남재(山南齋) · 수남재(水南齋) 등 각처에 이름 있는 재숙이 많았다.

일반서민의 교육을 목적으로 현대식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6년 양전백 · 김석창(金錫昌)이 선천중학회를 조직해 선천남교회에서 신성학교(信聖學校)의 개교식을 거행한 것이 효시이다. 북미주장로교 선교회의 선교사 위대모(魏大模, Whitmore, N.C.)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자매학교인 보성여학교와 명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교육구국의 이념으로 설립된 학교가 선천군 한 곳에만도 100여 개교가 넘었다. 1908년 선천공립보통학교의 개교를 계기로 점차 1면 1교의 교육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1935년 이영학(李英學)이 세운 선천회관은 군민의 문화전당으로, 이곳을 모체로 선천상업학교와 선천공업실수학교가 설립되었다. 광복을 전후해 사립 국민학교 11개교, 공립 국민학교 20개교, 남자중 · 고등학교 3개교, 여자중학교 2개교, 전문학교 1개교가 있었다.

한편 종교상황을 보면, 1930년대에 보덕사(寶德寺) · 용흥사(龍興寺) · 보록사 등 10여 개의 사찰 및 암자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선천 지역이 일찍이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교세가 미미하였다.

기독교의 경우 1890년경 선천을 본거지로 포교에 주력한 북미주장로교회 선교단에 의해 교세가 확장되어 종교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2년 42개의 교회에 교인 1만 5200명이 있었다.

천도교는 1890년대 초부터 포교되기 시작해 교세가 늘자 교당인 포덕당(布德堂)을 세우고, 3·1운동 때는 기독교신자와 더불어 독립운동에 주도적 구실을 했으나, 일제의 모진 탄압으로 교세를 확장할 수 없었다.

사회복지시설로는 20세기 초에 의료원양성소를 병설한 종합병원 규모의 미동병원이 선교단에 의해 설립되었고, 병원 2개, 의원 12개, 치과의원 3개 등의 의료기관이 있었으며, 대동고아원 · 선천양로원 등의 시설도 있었다. 〈崔處官〉

이 지방의 설화로는 〈아흔아홉우물〉과 〈검산과 삼각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아흔아홉우물〉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태산면 유사포 앞에 접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칠월칠석날 하늘에서 선녀 99명이 내려와 우물 하나에 선녀 한 명씩 들어가서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우물이 있었다. 어느 해에는 가뭄이 들어 물이 말라 버렸는데 이 우물에는 맑은 물이 가득하였다.

어느 칠석날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그 섬 앞을 지나가던 어부가 그것을 보고 섬에 올라가 선녀가 벗어 놓은 웃옷과 구슬 하나를 가져갔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은 옷을 입고 구슬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옷과 구슬을 잃은 한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우물가에서 아흔아홉날을 울고만 있었다. 용왕이 이 울음소리를 듣고 선녀를 용궁으로 데려갔다. 그 뒤 칠석날이 되어도 이곳에서 선녀들이 목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그 우물 흔적만 남아 있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오래 전부터 일반에게 널리 불려 온 것으로 〈시집살이요〉 등이 전해지고 있다. “형님형님 사촌형님/시집살이 어떱니까/아구 얘야 말두 마라/고초당초 맵다더니/시집살이 더 맵더라/시집살이 삼년만에/붓끝같던 이 내 손이/오리발이 다 됐단다/삼단같던 머리채가/숫밤송이 되었단다.”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부녀자들이 지루한 일을 할 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콧노래로 부른다. 그 외에 시집살이하는 동안 친정부모를 뵈러 갈 여유도 없다가 친정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난 뒤의 서러운 심정을 노래한 〈시집살이요〉가 전해진다.

민속놀이로는 씨름과 그네뛰기가 있다. 이 지방에서는 단옷날을 큰 명절로 해 이 때는 모든 생업을 쉬며, 가정에서는 깨끗한 옷과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 먹는다.

씨름장소는 강가의 모래사장인데 아침부터 시작해 처음에는 어린아이와 청장년이 씨름을 벌이고, 오후 늦게는 장사씨름판이 된다. 승자에게는 상품을 주는데 상품으로는 식기 · 포목 등이 보통이며, 최우승자에게는 장원이라 해 황소 한 마리를 준다. 장사씨름에는 지역 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전국에서 장사들이 모여든다.

그네뛰기는 고목의 가지나 광장에 굵은 기둥 두 개를 세운 다음 동아줄을 매어 그네를 만든다. 이것은 부녀자들의 놀이이지만 남자도 뛸 수 있다. 가장 높이 올라가게 뛰는 사람이 우승자가 되며, 상품으로는 화장품 · 은가락지 · 대야 · 신발 · 포목 등을 준다.

산업 · 교통

남부에 비교적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를 끼고 있어 주산업은 농업이다. 각처에 수리시설이 완공되어 논이 증가함에 따라 쌀 생산도 증가하였다.

밭작물로는 조 · 콩 · 밀 · 옥수수 · 대마 등이 생산된다. 부업으로 누에치기 · 축우사육 · 양돈 · 직조 등이 이루어진다. 광물질로는 금 · 흑연 등이 산출되며, 금광으로 36개의 광구(鑛區)가 지정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선천금광이 대표적이다.

선천읍 동운동에 있는 선천임업묘포장(宣川林業苗圃場)은 약 5만 평에 이르는 규모로 도내 제일의 묘포장이다. 조림시책의 일환으로 인공조림을 장려하고자 여러 가지 수종의 종묘를 재배했으며, 이곳에서 산출되는 묘목은 도내의 각 군에 배포된다.

이곳의 토양은 질이 좋은 부식 사질토이다. 재배되는 묘목의 종류로는 침엽수로 낙엽송 · 소나무 · 리기다소나무 · 측백나무 등이 있고, 활엽수로 밤나무 · 오리나무 · 아카시아 · 느릅나무 · 벚나무 등이 있다.

연안일대에서는 조기 · 새우 · 뱅어 · 조개 등이 잡힌다. 특히 신미도 부근은 조기의 산란장으로 위도(蝟島) · 연평도(延坪島)와 함께 우리 나라의 3대 조기어장을 이룬다. 명산물로 어란 · 은어 · 갈매기알 등이 있다.

시장으로는 1920년대에 선천읍의 선천장, 심천면의 고군영장(古軍營場, 일명 淸江場), 동면의 노하장(路下場)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한 시장은 3·8일의 선천장인데, 이곳에서는 거래하는 물건에 따라 싸전거리 · 생물전거리 · 포목전거리 · 마우전거리[牛市場] 등으로 구분해 장이 섰다. 농민들은 대개 곡식류, 손으로 짠 천, 가축, 달걀, 가마니 등을 가지고 장에 와서 고무신 · 광목 · 등유 등 일용잡화를 사 갔다.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곳의 물건들은 평양 · 경성 등에까지 팔려 나갔다. 선천장이 더욱 번성하자 장소가 협소해져 1936년에는 안국동에 대지 2,000평을 마련해 수산물과 일용잡화장이 이사를 했고, 월천동에 1,000평 가량의 가축시장이 새로 설립되었다. 고군영장은 2·7일의 5일장으로, 평안북도에서는 네 번째로 거래액의 규모가 큰 장이었다.

도로망은 선천읍을 중심으로 각처로 연결된다. 의주가도(義州街道)는 국도로 경의선(京義線)과 평행하며 북쪽으로는 신의주시, 남쪽으로는 평양시와 연결된다. 또한 선천읍에서 분기된 지방도로가 구성(龜城) 방면으로 연결되어 연안지방의 개발에 큰 몫을 한다. 이 밖에 각 면 소재지로 지방도로가 통한다. 철도는 경의선이 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노하 · 선천 · 동림의 세 역이 있다.

남면 석화동에 있는 대지(大池)는 관개용수로 이용되는 호소(湖沼)로, 석호(石湖)라고도 한다. 1668년(현종 9)에 굴착되어 장용영(壯勇營)에 하사되었다. 1672년 백성들이 5,000냥을 투자해 장용영에 납부한 다음 민간 전답의 관개수로 이용되었다.

1683년 부사 김중삼(金重三)이 대지 서쪽 모퉁이에 있는 수구에 토사가 쌓이자 그 토사를 다시 파내었다고 하는데, 둘레 4.2㎞, 높이 2.73m였다. 그러나 현재는 약 0.24㎢의 호면을 유지하고 있다.

적은 양이기는 하나 부근에서 양질의 토탄이 산출되어 더욱 유명하다. 이곳 주위에서 솟는 약수는 탄산가스의 함량이 많은 광천으로 유명하며, 만병통치에 효험이 있는 약수터로 알려져 널리 애용된다.

동림역에서 5.5㎞ 지점에 있는, 심천면 동림동 동림성 안의 동림폭포(東林瀑布)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높이는 20m에 불과하지만 폭포수가 물안개 속에서 굉음을 울리며 쏟아지는 장관은 형용하기 어려운 경지를 이루며, 마치 구천의 은하수가 무리 지어 내리듯 맑은 물이 연못 중심으로 쏟아져 온 산에 메아리친다.

폭포의 양쪽은 거암 절벽이 깊은 벼랑을 이룬다. 폭포 부근에는 수영장을 비롯해 시설이 잘 갖추어진 경치 좋은 유원지가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객이나 관광객을 위해 간이정거장이 설치된다.

읍 · 면

[선천읍宣川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18.26㎢, 인구 2만 2731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창동이다. 1931년 선천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대목산이 군산면 대목동과의 경계에 있으며, 월천강이 무골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월천동 앞을 지나 신부면 당모루 앞에서 청강의 본류와 합류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사방으로 광고개 · 부시재고개 · 태천모루고개 · 박수고개 등의 고개가 있다. 놋대접과 바리 등의 유기가 생산되며, 목공소가 많아 장롱 · 사무용구 · 가구의 제작이 성황을 이루어 각지로 반출된다.

1930년대에 피복공장이 설립되었으며, 가내부업으로 무명 · 삼베 · 명주 등이 생산되어 선천장에서 거래된다. 또한 농산물의 집산지로 선천장은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꼽힌다.

기타 금융조합과 금 · 은광을 비롯해 흑연광 및 선천임업묘포장 등 각종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교통은 경의선과 국도인 의주가도가 평행하게 읍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각처로 지방도로가 분기되어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 중학교 3개교가 있다. 창(倉) · 일출(日出) · 대화(大和) · 남산(南山) · 황금(黃金) · 본(本) · 영(榮) · 욱(旭) · 대목(大睦) · 명치(明治) · 명륜(明倫) · 소화(昭和) · 수(壽) · 북(北) · 금(錦) · 유(柳) · 동운(東雲) · 월천(越川) 등 18개 동이 있다.

[군산면郡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2.05㎢, 인구 8,78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교동이다. 북쪽 경계에 무골산(無骨山, 335m)이 있는데 무학산(無鶴山)이라고도 한다.

남쪽의 보강천 연변인 장공동 · 봉산동 · 연봉동 일대에는 장송평야가 있고, 사교동 · 고부동 · 용동 일대에는 고부평야가 있어 넓은 경작지가 형성되어 쌀이 많이 생산된다. 그 밖에 누에치기와 면화 · 콩 · 옥수수 · 수수 · 기장 등이 재배된다.

식생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가문비나무 · 전나무 · 낙엽송 · 아카시아 · 떡갈나무 · 참나무 등이 많아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을 이룬다. 경의선과 국도인 경의가도가 평행하게 동북부를 통과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봉산동의 해주김씨(海州金氏), 용동의 밀양박씨(密陽朴氏), 대목동의 수안계씨(遂安桂氏), 고부동의 아산이씨(牙山李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사교(沙橋) · 고부(古府) · 장공(長公) · 봉산(蓬山) · 대목(大睦) · 연봉(延峰) · 진석(眞石) · 용(龍) 등 8개 동이 있다.

[남면南面]

군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면. 면적 85.84㎢, 인구 1만 256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봉동이다. 동래강 하구 부근에 약간의 충적층이 있으나 대부분은 제3기의 화강암층이며, 해안지방 일부에는 수성변성암의 단애도 있다. 선천산맥 줄기가 동남부로 길게 뻗어 내려, 남면에서 바다를 건너 신미도에 이르러 운종산을 이루며 황해에 임한다.

운종산 기슭에는 옛날 임경업이 무술을 연마하던 검바위가 있으며, 해안에는 옛 봉화대와 샘이 있고 경치 좋은 해수욕장이 있어 휴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신미도의 당후포는 우리 나라 3대 조기어장의 하나로, 조기파시로도 유명한 어항이다.

석호동에는 해안산(海岸山, 182m)이 남면평야의 중앙에 잔구성으로 남아 있고, 삼성 · 석화 · 거포(巨浦) · 석호 · 무송(無松) 등의 동래강 일대에는 군에서 가장 넓은 남서평야가 전개되어 쌀이 많이 생산된다.

이 평야의 관개에는 석화동에 있는 석호의 물이 이용된다. 신미도에도 갈호(葛湖)가 있어 관개에 이용된다. 신미도 남쪽에 있는 무인도인 납도(臘島)는 괭이갈매기 · 흰수염바다오리 · 쇄범로의 서식처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벼농사가 주종을 이루며, 이 밖에 신미도 · 지도 · 월자도(月子島) · 아도(鴉島) · 묵도(墨島) 등의 크고 작은 섬에서는 조기 · 갈치 · 황석어 · 전어 · 낙지 등의 어류와 홍합 · 바지락 등의 패류가 많이 잡힌다.

일부지역에서는 약간의 제염업도 이루어진다. 경의선과 경의가도에서 멀리 벗어난 지역으로 육상교통은 불편하지만 해상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삼봉동의 죽산박씨(竹山朴氏), 석화동의 남평문씨(南平文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6개교가 있다. 삼봉(三峰) · 건산(建山) · 석호(石湖) · 삼성(三省) · 석화(石和) · 신미(身彌) · 문사(文泗) · 동담(東潭) 등 8개 동이 있다.

[동면東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73.04㎢, 인구 7,36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노하동이다. 서남쪽으로 군산면과의 경계에 무골산이 있으며, 북쪽으로 일봉(日峰, 254m)이 있고, 동쪽 경계를 따라 동래강이 심하게 곡류하면서 남류해 황해로 들어간다.

무골산의 동쪽 산기슭에서 발원한 대동천(大同川)이 인곡동에 있는 남송평야(南松平野)의 중앙을 흘러 동래강의 중류로 유입한다.

동래강의 하류 일대에는 남서평야와 다미평야(多米平野)가 전개되어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그 밖에 수수 · 콩 · 조 등이 경작된다. 부업으로 누에치기가 이루어지며 특용작물로는 면화와 대마가 생산된다. 송현동과 인곡동의 경계로부터 남송부락(南松部落)까지는 3.6㎞의 송정제방(松亭堤防)이 뻗어 있다. 식생은 소나무가 주종이고, 떡갈나무 · 참나무 · 전나무 · 가문비나무 등의 혼합림을 이룬다.

경의선과 경의가도가 남부를 평행하게 달리며 노하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노하동의 담양전씨(潭陽田氏) · 경주김씨 · 수원김씨, 인곡동의 해주최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4개교가 있다. 노하(路下) · 인곡(仁谷) · 노상(路上) · 송현(松峴) · 일봉(日峰) · 월영(月影) 등 6개 동이 있다.

[수청면 水淸面]

군의 서부 해안지대에 위치한 면. 면적 43.07㎢, 인구 7,29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가물남동이다. 북쪽에는 가물남산(嘉物南山, 459m)이 있고, 서쪽에는 청강이 남류하면서 황해로 들어가는데, 학현동 일대에 넓은 충적지를 형성시켜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북부의 학고개 너머로 목사대평야(牧使垈平野)가 있고, 남부에는 안산동 서동마을을 지나 청강하류의 개펄지대에 학현평야(鶴峴平野)가 있다. 이곳에 10.4㎞의 학현제방이 있어 조류의 침입을 막아 준다. 또한 동남쪽 경계를 흐르는 고읍천(古邑川)이 황해로 유입하면서 연변에 소규모의 논농사지대를 형성한다.

식생은 전나무 · 가문비나무 ·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이 밖에 사방사업에 의한 오리나무 · 아카시아도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특히 쌀이 많이 생산되며, 조 · 옥수수 · 콩 등도 재배된다. 북부의 산간지대에서는 감자 · 고구마 · 보리를 재배하고, 가물남산의 구릉지대에는 사과 · 복숭아 · 배 · 포도 등의 과수원이 있다.

남부해안의 삼곶도(三串島) · 내도(內島) 등에서는 조기 · 낙지 · 갈치 · 병어 · 홍합 · 백합 등의 해산물이 어획, 채취되며, 빙장포 · 신둥포 · 망둥포 등은 이름 난 어항이다. 교통은 지방도로가 세 갈래로 뻗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가물남동의 연안차씨(延安車氏), 안산동의 청주한씨(淸州韓氏), 학현동의 영천김씨(永川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가물남(嘉物南) · 고읍(古邑) · 안산(雁山) · 학현(鶴峴) · 목사대(牧使垈) 등 5개 동이 있다.

[신부면新府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87.28㎢, 인구 1만 8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동이다. 산성동에는 검산이 있어 산세가 험하다. 동남부에는 정재산(靜在山, 252m) · 안상산(安上山, 260m) · 백현산(白峴山, 305m) 등이 있어 낮은 구릉지를 이루나, 서부지역인 당우동과 청강동 일대는 청강이 남류하면서 청강평야를 형성해 쌀이 많이 생산된다. 그 밖에 조 · 옥수수 · 수수의 재배와 누에치기 등도 이루어진다.

연강수량은 1,050㎜로 여름 3개월 동안 총강수량의 63%가 집중하므로, 다른 지방과 같이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의 피해가 적지 않다. 주된 수종은 소나무이며, 그 밖에 낙엽송 · 전나무 · 가문비나무 · 느티나무 · 박달나무 등이 산재해 있다. 높은 지대에는 침엽수림이, 낮은 지대에는 활엽수림이 있어 혼합림을 이룬다.

경의선과 경의가도가 면의 중앙을 평행하게 달리며, 동림역이 설치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원동의 파평윤씨, 농건동의 진주강씨, 청강동의 배천조씨(白川趙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검산에는 고려 때 창건한 보덕사(寶德寺)가 있으며, 여기에서 샘솟는 약수는 검산약수라 하는데 수질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산꼭대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군민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던 검산성(劍山城)이 있다. 성 안에는 용흥사(龍興寺)와 임경업(林慶業)을 제향하는 충민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원(院) · 청강(淸江) · 대목(大睦) · 농건(農建) · 안상(安上) · 백현(白峴) · 산성(山城) · 승지(承旨) 등 8개 동이 있다.

[심천면深川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85.55㎢, 인구 9,52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군영동이다. 주요 산으로는 철산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현산(峴山, 295m)을 비롯해 마성동의 마성산(磨星山), 동림동의 소산(所山)이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안화골이라 불렸던 곳으로 남쪽 산기슭에는 관서팔경의 하나인 동림폭포가 있다.

식생으로는 가문비나무 · 소나무 · 전나무 · 낙엽송 같은 침엽수와 참나무 · 떡갈나무 같은 활엽수가 혼재하나 주된 수종은 소나무이다. 남동부의 청강 일대인 인두동과 마성동 일대에는 인두평야(仁豆平野)와 연봉평야(淵鳳平野)가 있어 넓은 경작지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옥수수 · 콩 등이 있으며, 특히 쌀이 많이 산출된다. 자연생 뽕나무가 산재해 누에치기가 활발하며, 1935년에 개량종 뽕나무의 재배를 권장함에 따라 명주의 명산지로 더욱 유명해졌다. 경의선과 경의가도가 면의 중앙을 평행하게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동림산성이 있다. 고군영동의 수안계씨, 오봉동의 안동김씨, 마성동의 아산이씨 · 선산길씨(善山吉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고군영(古軍營) · 동림(東林) · 마성(磨星) · 인두(仁豆) · 부황(付皇) · 월곡(月谷) 등 6개 동이 있다.

[용연면 龍淵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86.81㎢, 인구 1만 34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색담동이다. 높고 험준한 산이 많으며, 신풍동의 낙희산(樂喜山, 683m)은 구성군 사기면(沙器面)과의 경계에 있는데, 탁기산(卓旗山)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문수산 · 우산봉(牛山峰, 512m) · 도미나산(都美羅山, 510m) · 토미산(吐美山, 510m) · 태봉산(泰峰山, 593m) 등이 면의 각 경계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응봉동과 신풍동 일대에는 좁은 계곡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면의 경계에 자운령(紫雲嶺) · 천령(天嶺) · 향산령 · 두무령(頭茂嶺) 등의 고개가 있어 교통에 불편을 준다. 신풍동을 중심으로 인봉동 · 송정동 일대의 계곡분지를 연결하는 신풍평야와 보암동 · 성적동 일대의 성적평야 지대에서 약간의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수수 · 조 · 옥수수 · 기장 · 면화 등이며, 누에치기도 활발하다.

내산과 향산령에서 발원한 청강이 남류해 황해로 유입되고, 대서강(臺西江)이 면의 중앙을 흘러 청강에 합류한다. 식생은 전나무 · 가문비나무 · 소나무 · 낙엽송 등의 침엽수가 많으며, 낮은 지대에 참나무 · 상수리나무 · 떡갈나무 등의 활엽수가 혼재하는 혼합림을 이룬다. 도로는 지방도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 사방으로 산과 고개가 많아 교통이 불편하다.

보암동의 해주오씨, 향산동의 강릉유씨(江陵劉氏), 응봉동의 전주최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색담(色淡) · 보암(保巖) · 용경(龍耕) · 향산(香山) · 은봉(殷峰) · 응봉(鷹峰) · 신풍(新豊) · 하단(下端) · 상단(上端) · 인봉(仁峰) · 성적(聖蹟) 등 11개 동이 있다.

[태산면台山面]

군의 남부해안에 위치한 면. 면적 30.62㎢, 인구 6,54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봉동이다. 남단은 황해에 접해 있으며, 중앙에 위치한 직포(直浦)에는 내만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해상에는 죽도(竹島)가 있으며 넓은 간석지가 나타난다.

중앙에는 소원산(小圓山, 170m)과 대원산(大圓山, 203m)이 있으며, 길성동 일대의 고읍천 연변에 길성평야(吉星平野), 칠성동 일대에 원동평야(遠東平野)가 있어 쌀이 많이 생산된다. 보강천(普江川)에 있는 칠성제방(七星堤防)의 우측 상단까지 남령제방(南嶺堤防)이 건설되어 일대에 넓은 간척평야가 전개된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쌀이 주로 생산되며, 이 밖에 옥수수 · 수수 등이 경작된다. 식생은 주로 침엽수종으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가문비나무 · 잣나무 · 낙엽송 등이 있다. 싸리나무는 해안어촌에서 고기 잡는 데 사용하는 살발과 돌말의 재료도 많이 쓰인다.

남부해안에서는 담수와 염수가 만나 농어 · 숭어 · 새우 · 망둥이 등이 잡힌다. 해안의 넓은 간척지는 바지락 · 백합 · 홍합 · 고막 등 패류의 서식과 양식에 적합해 높은 수확고를 올린다. 일부지역에서는 제염업도 약간 이루어진다.

철도나 국도가 없이 지방도로가 세 갈래로 뻗었을 뿐이어서 교통이 불편하다. 길성동의 담양전씨, 원봉동의 아산이씨 · 해주김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원봉(圓峰) · 인암(仁巖) · 길성(吉星) · 오성(五星) · 칠성(七星) 등 5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서해안 중부에 있는 군. 동쪽은 구성시 · 곽산군, 서쪽은 동림군, 북쪽은 천마군, 남쪽은 황해와 접해 있다. 동경 124°47′∼125°08′, 북위 39°29′∼39°54′에 위치하며, 인구는 16만 10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예로부터 있던 선천면 · 동면 · 군산면 · 남면 · 태산면 · 운종면의 전체 동과 수청면 · 신부면의 일부, 구성군 · 정주군의 일부지역으로 이루어졌다. 1954년 10월 철천리 일부를 분리해 선천읍에 편입하였다.

행정구역은 선천읍과 월천(越川) · 백현(白峴) · 안상(安上) · 인암(仁巖) · 수청(水淸) · 고성(古城) · 원봉(圓峰) · 삼봉(三峰) · 석화(石和) · 삼성(三省) · 고부(古府) · 장공(長公) · 효자(孝子) · 연봉(延峰) · 노하(路下) · 인곡(仁谷) · 송현(松峴) · 일봉(日峰) · 장요(長腰) · 진도(眞島) · 약수(藥水) · 원창(院倉) · 문사(文泗) · 운종(雲從) 등 24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선천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언덕산지와 언덕벌이 많은 평야지대이며, 많은 섬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해안에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고, 신미도(身彌島) · 나비도[蝶島] 등의 섬이 있다. 연평균기온 8.5℃, 1월 평균기온 -9.2℃, 8월 평균기온 23.6℃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192㎜이다. 첫서리는 10월 4일경, 마감서리는 3월 24일경에 내린다.

[산업 · 교통]

산림이 군면적의 약 45%를 차지하며 산림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북동부 일대이다. 주산업은 농업과 수산업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콩 등이며, 과일로는 사과 · 배 · 복숭아 · 포도 등이 생산되고, 이 밖에 20여 종의 약초가 생산된다.

주요 수산물은 조기 · 전어 · 멸치 · 굴 등이며, 지방공업으로는 방직 · 피복 · 종이 · 화학 · 건재공업 등이 있다. 교통은 평의선 철도가 지나며 노하역 · 선천역이 있고, 선천읍을 중심으로 동림 · 대관 · 천마 · 구성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교육 · 문화]

황해상에 있는 신미도와 운종리의 나비섬은 바닷새번식보호구이며, 꼬리갈매기 · 바다뿔주둥이 · 호군이꽉새 · 가마우지 등의 희귀조류가 서식한다. 또한 신미도는 식물보호구이기도 하다.

선천군 납도에서 서식하는 저어새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세계적인 희귀새이다. 날씨가 사나워질 무렵이면 큰 소리로 울면서 뭍으로 날아들어 예로부터 어부들에게 날씨를 전해 주는 새로 알려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선천교육대학 및 선천고등중학교 · 선천여자고등중학교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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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시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국지명연구』(홍시환 -육군사관학교, 1968)
『신한국지리』(강석오, 새글사, 1971)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5)
『선천군지』(선천군지편찬위원회, 1976)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지방행정구역요람』(내무부, 1996)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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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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