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년(순조 28) 6월 1일의 연경당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2명의 무동이 긴 칼을 두 개씩 갖고, 머리에 고운계(高雲髻)를 얹고 석죽화(石竹花)를 그린 전복(戰服)에 은속대(銀束帶)를 하고, 호화(胡靴)를 신고 춤추었다.
‘공(公)이여 한왕(漢王, 유방)을 해치지 마시오(莫)’라는 뜻에서 유래된 검무 계열의 궁중 정재이다. ‘공막(公莫)’은 중국 진나라 말기 홍문(鴻門)에서 잔치가 열렸을 때, 항우(項羽)의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칼춤을 추게 하여 유방(劉邦, 한왕)을 죽이려 하자 유방 측의 항백(項伯)이 옷소매로 이를 막으며 한 말이다. 옷소매를 수건으로 상징화해서 중국에서는 건무(巾舞)라 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검무(劍舞)라 하였다. 이를 극적으로 재구성한 항장무(項莊舞)가 고종대에 유행하였다.
공막무의 무도홀기(舞圖笏記) 두 건이 장서각에 전한다. 두 건 모두 고종대에 무동이 춤춘 것으로 내용은 같으며, 1894년 『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의 공막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녕지곡(武寧之曲: 향당교주)을 연주하면 박을 친다. 무동 2인이 서로 마주하여 무작(舞作)하고, 춤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난다. 혹은 등지고, 혹은 얼굴을 대하고 돌면서 춤춘다.
악사가 칼을 갖고 들어와 뜰 가운데에 놓고 좌우로 나가면, 무동 2인이 마주보고 꿇어앉아 춤춘다. 칼을 어르다가, 칼을 잡고 번뜩여 회오리바람처럼 돌리며 춤춘다. 모두 일어나서 춤추다가 제비가 둥지로 돌아가는 듯한 연귀소(燕歸巢)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도는 연풍대(筵風擡)를 하고 춤추며 나아갔다 물러난다. 음악이 그친다.
홀기를 토대로 공막무가 재현되었다.
공막무의 춤절차는 첨수무(尖袖舞)와 같다. 검무의 춤절차도 거의 같은데, 검무는 악사가 미리 칼을 놓아두고, 공막무는 중간에 악사가 칼을 놓는 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