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부터 전하는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로 지금은 전하지 않음. ≪순조무자진작의궤 純祖戊子進爵儀軌≫(1828)에 의하면,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그 손을 반복하여 절주를 삼아 추기 때문에 속칭 ‘엽무(葉舞)’라고도 한다.
그러나 영조 때 악원(樂院)에 명하여 ‘첨수무’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 춤은 여기(女妓)의 춤과 무동(舞童)의 춤 두 가지가 있다. 여기의 춤은 4명이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두 대(隊)로 나누어 상대하면서 춘다. 무동이 출 때는 2명이 피변관(皮弁冠)을 쓰고 첨수의(尖袖衣)를 입고 각각 칼을 둘씩 들고 상대하면서 춘다.
칼을 들고 추는 첨수무는 농검(弄劒)·연귀소(燕歸巢)·연풍대(筵風擡) 등 검기무(劒器舞)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순조무자진작의궤≫에는 2명이 칼춤을 추고, 18명의 협무(挾舞)가 두 줄로 늘어서서 춤을 추고 있다.
또, ≪순조기축진찬의궤 純祖己丑進饌儀軌≫(1829)에는 여기 4명이 칼 대신 첨수(尖袖)로써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춤의 형태와 무원의 수에 변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춤의 반주로 쓰이는 음악은 향당교주(鄕唐交奏)이다.
≪순조기축진찬의궤≫에 의하면, 순조 29년 명정전(明政殿) 진찬 때의 무동의 복식은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녹색단령(綠色團領)에 화화방보(畫花方補)한다. 두석록정대(豆錫綠鞓帶)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는다.
여기는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草綠丹衣)·황초단삼(黃綃單衫), 속은 남색상(藍色裳), 겉은 홍초상(紅綃裳)에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띠고, 오채한삼(五彩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이 춤이 실려 있는 무보(舞譜)로는 ≪궁중정재무도홀기 宮中呈才舞圖笏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