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무 ()

목차
관련 정보
무용
작품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
이칭
이칭
검기무, 칼춤
내용 요약

검무는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이다. 일명 칼춤이라고도 하는데, 검기라는 칼과 함께 추며, 반주 음악으로 연주된다. 신라 소년 황창이 칼춤을 추며 백제왕을 죽이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성행하지 않았지만 기녀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졌다. 검무는 전립과 전복 등을 착용하고 춘다. 칼의 재질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된다. 순조 이후의 무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한말의 『정재무도홀기』에 그 무보가 전한다. 현재 ?진주검무?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차
정의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
내용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 검기무(劒器舞) 또는 칼춤이라고도 한다. 유래에 대해 『동경잡기(東京雜記)』『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모두 신라 소년 황창(黃昌)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왕을 죽이고 자기도 죽자, 신라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 얼굴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동경잡기』 관창조(官昌條)에 고려 말 및 조선 초 사람인 이첨(李詹)이 변백(辨白:변명)하기를, “을축년 겨울 주1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府尹) 배공(裵公)이 향악(鄕樂)을 베풀고 위로했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뜰에서 칼을 들고 춤을 추기에 물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신라에 황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15, 16세 정도이나 춤을 잘 추었다.”라고 한 기록에서 고려 말까지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첨은 같은 책에서 황창이라고 한 것은 관창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 하였다. 또, 이유원(李裕元)의 시문에서도 관창이 잘못 전해져서 황창랑으로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 밖에 『교방가요(敎坊歌謠)』에도 “황창을 혹은 관창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검무는 황창설과 관창설에서 비롯되었고, 주로 신라의 민간에서 추어 왔으며 고려 말까지 동자가 가면을 쓰고 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성행하지 않은 듯하다. 그 뒤 숙종김만중(金萬重)의 「관황창무(觀黃昌舞)」라는 칠언고시에 의하면 기녀들에 의하여 가면 없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의 「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는 검무의 한 갈래이고, 순조 이후의 『진연의궤』 · 『진찬의궤』 · 『진작의궤』 등에 「검무」의 무도(舞圖)가 전하고, 한말 『정재무도홀기』에는 그 무보(舞譜)가 전한다.

경술국치 이후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기녀들이 민간사회로 나와 그들에 의해 계속 추어졌으나, 사회적인 여건으로 인해 단축되고 변질되어 본래의 형태로부터 많이 축소되어 왔다. 또한, 조선 말기 궁중 진연과 유대를 맺고 왕래가 있었던 각 지방 주2이 설치되었던 지역에는 궁중 계열의 정재가 잔존해 있듯이, 검무도 각 도(道)마다 남아 있었다. 현재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진주검무」가 있는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재무도홀기』에 전하는 춤의 내용을 보면, 먼저 「무령지곡(武寧之曲)」을 연주하면 악사가 칼을 들고 들어와 주3에 놓고 양편으로 나간다. 박을 치면 무원 네 사람이 두 사람씩 마주서서 손을 벌려들고 앞으로 가고 뒤로 물러나며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등을 지기도 하며, 또 앞으로 향하여 춤추다가 상대(相對)하고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칼을 어른 다음 집어들고 돌려 번득이며 손을 놀리며 일어나 다시 춤추다가 주4가락으로 일렬이 되어 전진하고 후퇴하여 박을 세 번 치면 춤과 음악이 끝난다.

조선 중기 이후 검무에서 반주음악으로 연주되었던 곡은 순조 때는 「무령지곡」, 즉 「향당교주(鄕唐交奏)」와 「응상지곡(凝祥之曲)」 · 「다보자영(多寶子令)」이었고, 고종 때에도 「무령지곡」 · 「향당교주」였다. 진주검무의 반주악은 「영상회상」 가운데 삼현도드리 · 타령 · 빠른타령 · 매우빠른타령, 다시 빠른타령순으로 연주되고 있다.

의상은 전립(戰笠)을 쓰고 전복(戰服) 혹은 쾌자(掛子 · 快子)에 남색 전대(戰帶)를 띤다. 그러나 『교방가요』에는 두 사람은 융복(戎服), 두 사람은 황삼(黃衫)을 입었다. 진주검무에서는 전립 · 전복 · 전대 이외에 색한삼(色汗衫)을 사용한다.

무구(舞具)인 검기(劒器), 즉 칼은 13㎝ 가량 되는 둥글게 된 나무자루를 붉은색 비단으로 싸고 자루 끝에 색실을 달고, 26㎝ 가량 되는 주5 모양으로 날이 휘어진 곳에 붉은 술을 단 형태의 칼이 조선 말기인 1901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그런데 현재 사용하는 칼은 진주검무와 궁중검무을 제외하고 자루 끝에 ~변형되어 있다. 칼의 재질은 지역에 따라 백동, 철제, 놋쇠, 나무 등으로 다르게 사용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동경잡기(東京雜記)』
『진찬의궤(進饌儀軌)』(순조 기축·무자)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9)
「한국여기검무의 예술적 형식과 지역별 특성 연구」(임수정, 용인대 박사학위논문, 2006)
주석
주1

‘신라’의 다른 이름. 숲속에서 이상한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빛의 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었는데 그 궤 속에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가 있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2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의 관기들을 교육하고 관리한 관아 기관.    우리말샘

주3

대궐 안.    우리말샘

주4

승무ㆍ풍물놀이 따위에서, 오금을 구부렸다 일어나 도는 대신 허리를 뒤로 젖히고 한 발을 내디디며 유연하게 도는 춤사위.    우리말샘

주5

보병이나 기병(騎兵)이 쓰던 긴 칼을 이르던 말. 날은 반달 모양이고, 칼등의 중간에 딴 갈래가 있어서 이중(二重)의 상모를 달도록 구멍이 있으며, 밑은 용의 아가리를 물렸다. 중국식과 우리나라식의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나라 것의 전체 길이는 일곱 자로 중국 것보다 조금 길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