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연구소를 창설하여 활동한 무용가. 고수.
내용
1894년 이후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한말에 개관한 원각사(圓覺社) 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다. 원각사가 없어지게 되자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의 단체에서 지방을 순회공연하였다.
이 때 고수로서 15차의 창방(唱榜: 콩쿠르)을 치렀으며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 등 명창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이때 궁중무용을 접하면서 뒷날 「태평무(太平舞)」·「학무(鶴舞)」를 만드는 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고, 1934년에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조선무용연구소를 창설하고 제자를 기르는 한편, 1935년에는 부민관(府民館)에서 ‘한성준무용공연회’를 가졌다. 그 뒤 일본 동경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함으로써 무용을 일본에 소개하였고, 1941년에는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는 예술상(藝術賞)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태평무」·「학무」·「신선무」·「살풀이춤」·「한량무」·「사공무」·「농악무」 등이 있으며, 제자로는 김천흥(金千興)·김보남(金寶男)·이강선(李剛仙)·장홍심(張紅心)·한영숙(韓英淑)·강선영(姜善泳)·이매방(李梅芳)·정인방(鄭寅芳)·진수방(陳壽芳)·김삼화(金三和) 등이 있다.
참고문헌
- 『무용예술』(조원경, 해문사, 1967)
- 『조선창극사』(정로식, 조선일보사 출판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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