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충청남도 홍성 출생. 한천호의 아들이다. 7세 때부터 외할아버지 백운채(白雲彩)로부터 춤과 북을 배웠다. 14세 때부터 3년간 홍성 서학조(徐學祖)에게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웠으며, 이어 수덕산의 박순조(朴順祚) 문하에서 20세가 넘도록 춤과 장단공부를 하였다.
1894년 이후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한말에 개관한 원각사(圓覺社) 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다. 원각사가 없어지게 되자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의 단체에서 지방을 순회공연하였다.
이 때 고수로서 15차의 창방(唱榜: 콩쿠르)을 치렀으며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 등 명창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이때 궁중무용을 접하면서 뒷날 「태평무(太平舞)」·「학무(鶴舞)」를 만드는 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고, 1934년에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조선무용연구소를 창설하고 제자를 기르는 한편, 1935년에는 부민관(府民館)에서 ‘한성준무용공연회’를 가졌다. 그 뒤 일본 동경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함으로써 무용을 일본에 소개하였고, 1941년에는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는 예술상(藝術賞)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태평무」·「학무」·「신선무」·「살풀이춤」·「한량무」·「사공무」·「농악무」 등이 있으며, 제자로는 김천흥(金千興)·김보남(金寶男)·이강선(李剛仙)·장홍심(張紅心)·한영숙(韓英淑)·강선영(姜善泳)·이매방(李梅芳)·정인방(鄭寅芳)·진수방(陳壽芳)·김삼화(金三和) 등이 있다.